정조대왕 능행차 길을 따라 걸어본다
시간을 넘어 남아 있는 역사 현장을 찾아서
2025-02-25 14:44:30최종 업데이트 : 2025-02-25 14:44:28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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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지대 비각. 정조는 현륭원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서 머뭇거렸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이야기다. 정조는 현륭원을 조성하고, 새로운 도시 수원을 건설했다. 행궁과 성곽을 새로 만들고, 백성들이 살 터전을 마련했다. 1795년 을묘년 화성 행차 때는 혜경궁 홍씨와 조정 대신들까지 약 6천여 명과 함께 왔다. 그때 수원은 지지대 고개로부터 시작한다. 화성행궁을 지나 매교를 거쳐 상유천, 하유천, 대황교를 지났는데, 이 길이 정조 임금의 필로(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임금의 수레가 지나가던 길)였다. 지난 역사를 온몸으로 느껴보기 위해 그 길을 따라가 본다. 차디찬 바람이 귓가에 스치지만, 3월이 가까운 길에는 어김없이 봄기운이 느껴진다. 지지대 고개는 늘 차를 타고 지나는 곳이다. 걸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쉼터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간다. 하마비와 계단이 먼저 마중을 한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비각이 있다. 설명 글에서 정조를 그리는 후손들 마음을 읽는다. 정조는 현륭원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서 머뭇거렸다. 고개를 넘어 한양 길로 접어들면 원소는 점점 멀어진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이야기다. 이에 고개 이름을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했다는 기록이다. 지지대비는 1807년(순조 7)에 건립했다. ![]() 괴목정교. 이 표석은 현륭원 행차길 중요 지점마다 세웠던 16개 표석 중 하나다. 선조들이 귀중한 역사를 남겨 주었다. 인류의 보편적 정서인 효심을 구체적 증거물로 남겼다. 덕분에 우리는 지금 정신과 역사적 유적을 함께 만난다. 우리는 후손에게 어떤 역사를 물려줄 수 있을까. 생각이 깊어진다. 고개에서 광교산 쪽으로 프랑스 참전 기념비가 있다. 그 길을 따라 내려오면 괴목정교가 발길을 잡는다. 이 표석은 현륭원 행차길 중요 지점마다 세웠던 16개 표석 중 하나다. 표석은 복제본이고, 원본은 수원박물관에 있다고 친절한 설명도 있다. ![]() 노송지대 안내판. 정조가 찾았던 현륭원 참배 길을 그려 놓았다. 임금 행렬은 노송지대로 이어진다. 이 길은 정조가 현륭원 식목관에게 내탕금(임금 개인재산) 1,000량을 하사해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어 조성됐다. 지금은 소나무만 남았다. 오랜 세월의 무게에 소나무는 허리가 굽은 것이 많다. 그런데 이게 더 운치가 있다. 이 멋진 것에 반해 사람들은 특별히 노송이라고 하나 보다. 이곳은 이제 노송공원이다. 산책로가 있고, 곳곳에 감성이 도는 시설물들이 함께 어울려있다. 오랜 시간에도 남아 있는 유적이 있는가 하면 없어진 것도 있다. 파장동 장승이다. 지지대를 시작으로 융건릉까지 5리마다 세워 11곳이 있었다고 전한다. 판소리 <변강쇠가>에도 이곳 장승이 나온다. 변강쇠가 땔감으로 장승을 팼다. 장승은 마을 수호신 격인데, 패악을 저지른 것이다. 이에 대방 장승이 놀라 전국 장승을 모이도록 했는데, "이 변이 큰 변이라. 경홀(輕忽) 작처(酌處) 못 할 테니 사근내(沙斤乃) 공원(公員)님과 지지대(遲遲臺) 유사(有司)님께 내 전갈(傳喝) 여쭙기를~"이라고 했다. 대방 장승이 '사근내 공원님'과 '지지대 유사님'을 모셔다가 논의를 하고, 전국적인 장승 회의를 연다. 그 정도로 여기 장승들은 대표성을 띠고 있다. ![]() 상유천. 임금 행차길 주요 지점에 세웠던 표석. 매교역 근처 세류 성원아파트 맞은편에 있다. 시간이 지나면 세상은 변하는 것처럼, 장승들은 모두 사라졌다. 다행히 역사를 잇고 보전하는 흔적이 있다. 현재 수원박물관 야외전시장에 파장동 미륵당마을 장승을 재현해서 전시하고 있다. 세류동(147-2)은 마을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버드내 대장군 버드내 여장군'을 세워 놓았다. 장승 그리기 대회도 해서 우수 작품을 유천2교(수원천 제23교)에 벽화로 장식했다. 물길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듯, 수원천 주변도 백성들이 살았다. 임금 행렬도 이곳을 지났다. 긴 행렬이 느릿하게 갔지만, 마음만은 벌써 현륭원으로 간다. 매교를 지나 상유천으로 간다. 상유천은 매교역 근처 세류 성원아파트 맞은편에 있다. 원래 개울가에 있던 것을 물길이 바뀌면서 여기로 왔다. 이것도 복제본이고 원본은 수원화성박물관에 있다. 하유천도 현륭원을 찾아가는 정조 임금 필로였다. 하유천 표석은 세류역 출입구 왼쪽에 있다. 이 또한 방치된 것이었는데, 현재 자리에 복제본을 세우고 원본은 수원화성박물관으로 옮겼다. 화단 모퉁이에 초라하게 있지만, 마주하는 순간 그때의 숨결은 그대로 전해온다. ![]() 하유천 표석은 세류역 출입구 왼쪽에 있다. 화단 모퉁이에 초라하게 있지만, 마주하는 순간 그때의 숨결은 그대로 전해온다. 정조는 현륭원을 13번이나 찾았고, 이후 모든 국왕이 수원을 찾았다. 고종 때는 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었으니 왕릉(융릉)에 오는 길이 됐다. 1908년 순종 황제는 기차를 타고 왔다. 수원역이 생겨 능행 길이 달라졌다. 지지대고개를 넘어 현륭원으로 가는 임금 행차를 수원 백성들은 멀리서나마 봤는데, 그마저도 볼 수 없게 됐다. 시간을 넘어 남아 있는 역사적 공간을 찾아다녔다. 과거의 시간이지만 내면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정조 이래 순종 황제까지 6대 임금이 찾은 수원이다. 당시 장엄한 행렬이 그려진다. 역사 현장과 길가에 작은 표석이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많은 임금이 다녀간 도시가 있을까. 수원만의 역사고 자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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