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대한민국 음악계의 선구자, 홍난파 선생의 유적 답사
수원화성 팔달산, 전망 좋은 기슭에 ‘고향의 봄’ 노래비 세워져  
2023-04-03 22:54:51최종 업데이트 : 2023-07-06 16:31:10 작성자 : 시민기자   홍명후

홍난파 선생 '고향의 봄' 노래비 모습

홍난파 선생 '고향의 봄' 노래비 모습


지난 1일 따뜻한 봄날, 필자는 팔달산 기슭에 있는 음악계의 선구자 홍난파(1898~1941)의 '고향의 봄' 노래비를 물어물어 찾았다. 수원화성 내 팔달산에 전적비, 3.1운동 기념비 등이 있지만 역사, 문화계 인물의 기념비의 경우, '조선시대 제22대 정조대왕 동상'과 '홍난파 선생의 노래비'가 유일하다. 이외에는 수원화성 내 나혜석 생가터와 수원화성박물관 앞 정원에 있는 조선시대 수원 유수(留守) 10명의 선정비가 있다.

 

춘사월 초, 봄 노래를 음미하면서 홍난파 선생의 '고향의 봄' 노래비를 답사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날 노래비 주위에는 개나리, 벚꽃이 예년에 비해 일찍 꽃망울을 터트려 화사하기까지 했다.
 

노래비 주위는 개나리, 벚꽃이 핀 봄날

노래비 주위에 핀 화사한 개나리, 벚꽃들


또한 그의 노래비에서 수원 시내 장안을 내려다보면 행궁동 일대와 화성행궁이 보이고, 팔달문과 수원화성 장안의 중심 번화가 상권이 잘 보인다. 
 

행궁동 일대의 화성행궁이 조망

행궁동 일대의 화성행궁이 보인다.

내려다 보이는 팔달문 과 시장상권 일대

내려다 보이는 팔달문과 시장 상권 일대


그의 노래비문에는 "수원이 낳은 우리 음악계의 선구자, 홍난파 선생이 지으신 '고향의 봄' 악보를 선생이 태어나신 지 70돌이자, 신체시가 생긴지 60돌인 1968년 가을에, 우리고장 어린이와 어른들의 정성으로 여기 노래비를 해 세움"이라고 새겨져 있다.

 

1968년 '수원노래비건립위원회(위원장 박용석외 8명)'가 노래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 후 1974년 7월 경기도지사 조병규, 수원시장 유기천, 유신학원 이사장 박창원 등의 도움으로 예총수원지부와 새싹회에서 보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난파 선생은 1897년 4월 10일 태어났다. 그는 3세 때 상경해 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거주하면서 새문안교회에 출석했고, 어릴 적부터 교회음악을 비롯한 서양음악에 입문할 수 있었다. 소년 시절에는 집안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사립 영신소학교에 다녔다.

 

14살 되던 1910년 9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 중학부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1914년 3월 졸업했다. 그 사이 1912년부터는 근대 이후에 설립된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성악과에 입학해 1913년 4월 2회로 졸업했다. 그리고 1913년 다시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에 입학해 1년 동안 바이올린을 배웠고, 1914년 졸업 후 이듬해인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에 임용되었다.
 

아름다운 수원화성 아치형 성곽

노래비 아래의 아름다운 수원화성 아치형 성곽과 도로


그는 일본 관립 도쿄음악학교, 도쿄고등음악학원, 미국 시카고 셔우드음악 학교를 나와 이화여자전문학교등에서 강사를 지냈다. 1937년 11월 이후에는 경성중앙방송국 방속관현악단 지휘자로 활동했다. 또한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 희망의 아침, 순정의 꽃장사 등을 작곡했으며, 지휘자로서 방송을 통해 군국가요를 보급하였다.

 

그는 이처럼 대한민국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이다. 그의 대표적 동요는 개구리, 고향의 봄, 무지개, 옥수수 하모니카, 작은 별, 퐁당퐁당, 햇볕은 쨍쨍이 있다. 가곡으로는 금강에 살으리랏다, 봄처녀, 봉선화, 성불사의 밤 등이 있다. 이는 우리세대가 어릴때 학교에서 음악시간에 주로 불렀던 곡이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며 잘 부를 수 있는 유명한 곡이다. 
 

그의 대표적인 동요 '고향의 봄' 노래비에 새겨진 악보는 다음과 같다. 
 

노래비에 새겨진 '고향의 봄' 악보

노래비에 새겨진 '고향의 봄' 악보


팔달산을 산책하는 60대 시민(행궁동)을 만나 홍난파 선생에 대하여 얼마나 아는가 물었다. 

그는 "어려서 학교 다닐 때 불렀던 노래가 거의 홍난파 곡이기 때문에 음악 시간외에도 소풍, 각종 모임 등에서 친구들과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그만한 음악가가 어디 있나. 그러기에 이곳 좋은 위치에 그를 기리고자 노래비를 세운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한편, 노래비에는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경기도에서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을 실시하며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을 설치하는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 일환으로 이곳에도 안내판이 자리 잡은 것이다.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에 홍난파의 이름과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음악계에 미치는 홍난파 선생의 영향력은 컸다고 생각한다. 그의 동요와 가곡이 오늘날까지 즐겨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총 경기도지회가 주최하는 '난파 음악제'도 1969년 8월 홍난파의 추모일을 기점으로 매년 이어지고 있다. 

 

홍명후님의 네임카드

수원화성, 팔달산, 홍난파선생, 고향의봄, 노래비, 홍명후

연관 뉴스


추천 2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