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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곳
2015-10-02 16:17:53최종 업데이트 : 2015-10-02 16:17:53 작성자 : 시민기자   공석남

융건릉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곳_3
융건릉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곳_3

지난 추석 대체 휴일인 29일 아이들을 데리고 융.건릉에 갔다.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안녕동)에 있는 융건릉은 조선 후기 장조(사도세자)와 정조의 릉이 있는 곳이다. 
융.건릉에 들어서면서 정조의 효심으로  언제나 지니고 다녔다는 은도장이 생각났다. 혼이라도 좋은 곳에 모시고 싶었던 정조의 한을 풀어준 곳이 화산의 융릉이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52년(1776) 2월 7일자에는 영조가 '효손(孝孫)'이라는 은도장을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조에게 내려주는 기사가 나온다. 왕세손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승정원일기'의 기사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효심에 감동하여 직접 효손이라고 쓰고 은인(銀印)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이 은도장과 관계된 일괄유물이 있다. '효손 83서(書)'라고 새겨진 거북이 모양의 은도장이 동판으로 어필은인(御筆銀印)이라고 붙인 주칠상자에 들어 있으며, 이때 영조가 직접 쓴 '유세손서(諭世孫書)'라는, 손자에게 이르는 글이 가죽 통에 들어 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에서

입구에 들어서면 우리나라 최고의 조선 소나무인 적송 숲이다. 깔밋한 나무들의 사열장을 지나서 언덕을 내려가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융릉이 보인다. 훤한 잔디마당을 이룬 곳,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이 보이고 뒤로 융릉이 평화롭게 들어앉았다. 돌 하나 계단 하나에도 사연이 있고 의미를 담고 있는 조선시대의 왕릉이다.

장조(사도세자)는 영빈 이씨의 소생으로 1736년(영조12년)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때 정치싸움에 휘말려 영조의 진노를 얻어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영조가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배봉산(지금의 휘경동)기슭에 초장한 것을 1789년(정조13년) 이곳으로 이장하고 현릉원으로 명명하였다 한다. 그 뒤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승격했다. 

융건릉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곳_4
융건릉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곳_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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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곳_1
융건릉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곳_1

융릉은 자세히 보면 정자각 바로 뒤로 릉이 있지 않고 조금 옆으로 빗겨나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답답했을 것을 생각하여, 죽어서까지 정자각에 가려서 답답함을 느끼지 않게 조금 옆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융릉의 자리가 반용농주형(盤龍弄珠形)으로 대길지라 하였다.

정조의 나이 열한 살에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히는 것을 알았다.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호통만 쳤던 영조였다. 그로부터 8일 만에 아버지는 차가운 주검으로 뒤주 밖 세상을 보았다.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어린 가슴에 맺힌 그 한을 누가 풀어줄 수 있을까.

사도세자가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처럼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노론, 소론, 남인들의 얽힌 정치행각으로 그리되었을까. 사도세자가 그렇게 죽은 후 영조는 훗날 왕위에 오를 때를 생각하여 효장세자(영조의 맏아들)의 양아들로 입적 시켰다. 죄인의 아들이라는 딱지가 두려웠던 영조였다.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 한 후 정조가 즉위하면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했다 한다. 그리고 왕릉 사방 40km이내에는 큰 건물이 없어야 하므로 정조는 이곳에 수원부 관아와 마을을 지금의 수원화성으로 옮기며 행궁을 만들었다. 또 성을 쌓으면서 "단 한사람의 억울한 백성이 없게 하겠다." 고 억울한 이란 단어에 힘을 주었단다. 그 말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1794년 1월13일 정조는 사도세자의 위패 앞에 향을 피우고 엎드려 일어서지 못하고 목메어 울었다. 정조실록엔 '상이 간장이 끊어질 듯 흐느껴 울었다'고 했다. 대신과 승지들의 부축을 받아 현릉원으로 올라간 정조는 제단 앞에 아버지의 진영(초상화)을 보자 몸을 땅 바닥에 던지고 통곡하였다 한다. 정조가 화성을 만들 당시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현릉원 근처에 묻어달라."고 했단다. 죽어서도 잊지 않고 아버지 옆에 묻히고 싶은 정조의 효심이었다. 

융릉으로 가기 위해 홍살문 안으로 들어서면 왕이 가는 길이 있고, 신하들이 걸어가는 길도 있다.  정자각을 오를 때도 사도세자의 영혼이 오르는 계단(신계)은 구름문양과 태극문양으로 새겨져 있으며, 둥글게 턱이 있다. 임금이 오르는 계단은 동계라고 한다. 서쪽에 있는 계단은 내려가는 곳이다. 이토록  규칙을 만들 듯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선 왕릉의 규모는 대단한 모양을 하고 있다. 가까이 가 볼 수는 없었지만, 평민의 묘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곳이었다.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것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500여 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융릉을 내려오면 릉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비스듬한 곳에 곤신지가 있다. 왕릉 옆에 연못이 있는 것은 처음으로 보았다.
'원형연못 곤신지는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 1790년 조성되었으며 곤신방(남서방향)은 융릉의 생방(풍수지리의 용어로 묘지에서 처음 보는 물을 지칭)으로 이곳이 좋은 곳이므로 판 연못입니다.' 라고 팻말에 적혀 있었다.

융건릉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곳_2
융건릉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곳_2

곤신지는 처음 발굴당시에는 연못의 반쪽이었는데, 나머지 부분은 콘크리트로 보수공사를 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연모했던 정조의 마음이 담겨있다고도 한다. 지금의 고신지엔 몇 포기 연잎들이 물 위로 올라와 있었고, 갖가지 색을 띤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 

곤신지를 지나 서쪽으로 건릉으로 가는 길이 있다. 멀지 않았지만 그곳은 참나무 숲으로 이루어졌다. 쭉쭉 뻗은 참나무들이 건릉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정조는 1759년 왕세손으로 책봉된 뒤 1776년 즉위하여 24년간 재위하였다. 그 후 1800년에 죽어 현릉원 동쪽에 초장하였다가 1821년 효의왕후가 죽자 현릉원 서쪽으로 이장하여 합장하였다. 그곳이 건릉이다.

평화롭게 9월의 햇살은 맑은 빛을 담고  융건릉을 비추고 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220여년 전의 역사를 능 위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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