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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화성행궁의 설경
정조의 효심과 이상이 담긴 화성행궁의 곳곳을 만나다
2024-01-11 15:27:52최종 업데이트 : 2024-01-11 15:27:50 작성자 : 시민기자   송은교

조선시대 최대의 행궁인 화성행궁의 아름다운 설경

조선시대 최대의 행궁인 화성행궁의 아름다운 설경


수원에서 겨울이 되면 꼭 방문해야 하는 장소들이 있다. 그중에서 눈이 내리는 날에 꼭 방문해야 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화성행궁이다. 화성행궁의 설경을 보고 있노라면, 정조의 효심과 이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지어진 행궁 중에서 가장 크게 지어진 곳이다. 이곳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면서 수원의 읍치를 이전하며 지어지게 되었다. 
 

본래는 수원부의 부사가 집무를 보는 관아였으며, 왕이 행차할 때는 행궁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던 1793년 1월 12일 정조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했고, 이와 함께 '화성행궁'이라는 편액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화성행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1789년 7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던 행궁은 특히 1795년 윤2월을 기점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1795년 을묘년원행을 위해 새롭게 만든 장락당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1795년 을묘년원행을 위해 새롭게 만든 장락당

 


1795년은 정조가 즉위한지 20주년 되는 해였으며,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환갑을 맞이한 해였다. 정조는 어머니의 환갑을 기념하며 수원으로 8일간 행차를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는 화성행궁에서 어머니가 머무를 수 있는 전각을 건축하기도 했다. 바로 그곳이 《장락당(長樂堂)》이다.
장락당은 한나라 태후의 거쳐였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온 곳이며, 정조는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직접 편액을 썼다.


장락당 바깥쪽에서 통하는 문인 경룡관과 지락문

장락당 바깥쪽에서 통하는 문인 경룡관과 지락문


장락당 바깥쪽에서 향하는 곳은 다락실로 《경룡관(景龍館)》이라 부른다. 경룡관은 당태종이 거처했던 궁궐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경룡'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의미한다. 그래서 당시 정조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나라의 태평성대를 실현시킬 방도를 구상하기도 했다.

경룡관 아래에는 《지락문(至樂門)》이라고 적혀있다. 즐거움에 이른다는 의미로,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봉수당진찬연도' 그림을 보면 경룡관 앞에 혜경궁 홍씨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마가 있다. 이 위치를 통해 당시 혜경궁 홍씨가 지락문을 통해서 봉수당 안쪽이나 장락당으로 이동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장락당에서 복내당으로 향하는 문인 동쪽의 장복문과 서쪽의 다복문

장락당에서 복내당으로 향하는 문인 동쪽의 장복문과 서쪽의 다복문


장락당에는 또 다른 문이 2개 더 있다. 동쪽의 문은 《장복문(長福門)》이고, 서쪽의 문은 《다복문(多福門)》이다. 두 문 모두 이름에 '복(福)'이 들어가고 있는데, 이를 통해 혜경궁 홍씨의 복을 기원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정조의 효심을 느껴볼 수 있다.
 

봉수당 뒤쪽으로 향하는 삼수문은 세 가지의 장수를 의미한다.

봉수당 뒤쪽으로 향하는 삼수문은 세 가지의 장수를 의미한다.


1795년 윤2월 13일, 화성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 진찬연이 진행된다. 정조는 진찬연이 끝나고 사용했던 물건을 잘 보관하라고 지시한다. 이는 이후 어머니의 칠순 수연 진찬 역시 화성행궁에서 하겠다는 그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봉수당은 장남헌이라 불렸으며, 1795년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을 하며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면서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로 봉수당(奉壽堂)으로 고쳤다.

그래서 봉수당의 상량문을 보면 '어머님의 나이가 회갑에 올랐으니 오래 사시길 바라는 임금님의 생각이 간절하다'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봉수당 뒤쪽에서 향하는 문의 이름에는 《삼수문(三壽門)》이 쓰인 걸 볼 수 있다. '삼수'는 세 가지의 장수로, '상수(上壽, 100세)', '중수(中壽, 80세)', '하수(下壽, 60세)'를 의미한다. 삼수문을 통해 보이는 봉수당의 뒷모습은 굴뚝과 함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화성행궁의 건축의 미를 느껴볼 수 있다.


정조의 꿈이 담긴 미로한정에서 바라보는 화성행궁의 설경

정조의 꿈이 담긴 미로한정에서 바라보는 화성행궁의 설경


화성행궁의 설경을 가장 잘 느껴볼 수 있는 곳은 단연, 《미로한정(未老閒亭)》이다. 미로한정은 화성행궁의 후원에 만들어진 정자로, 원래 미로한정은 육각 지붕으로 되어 있어 '육면정'이라 불리다가 1795년에 미로한정이라 불리게 되었다. 

미로한정이라는 이름은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다'라는 시구를 인용했다. 이를 통해 정조가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수원에 내려와 한가롭게 노년을 즐기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으로 내려와 살 계획이 있었다는 내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신하, 윤행임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화성을 쌓는 일에는 숨겨진 뜻이 있다. 그래서 당을 노래라고 하고, 정을 미로한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로한정에 올라 화성행궁의 전경을 보고 있으면, 곁에서 정조가 이 경치를 함께 즐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성 밖의 위험을 알리는 관측소인 내포사에 함께 있는 목어

성 밖의 위험을 알리는 관측소인 내포사에 함께 있는 목어

 


미로한정에서 살짝 내려오다 보면 작은 초소를 만날 수 있다. 《내포사(內鋪舍)》라고 부르는 곳이다. 내포사는 성 밖의 위험을 알리는 관측소와 같은 역할을 했던 군사 시설이다. 시야가 트여 있기에 행궁 밖에서 알려주는 신호를 받아 깃발을 흔들거나 소리를 내면서 방어 태세를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곳이었다. 

내포사에는 독특하게 사찰에서 만날 수 있는 목어가 매달려 있다. 목어는 나무에 물고기 형상을 조각하여 소리를 내는 불교 물건인데, 물고기가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있기에 스님들이 정진할 때 졸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에 이렇게 목어를 둔 이유는 아마 경계 근무를 설 때 졸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단청과 기와, 눈이 함께 어우러져 고즈넉한 화성행궁의 아름다움이 강조되다

단청과 기와, 눈이 함께 어우러져 고즈넉한 화성행궁의 아름다움이 강조되다


단청과 기와, 그리고 곡선미에 눈이 함께 어우러져서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화성행궁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었다.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모습을 띄고 있지만,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 설경도 꼭 함께 만나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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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정조, 혜경궁홍씨,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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