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수원화성 축성, 흙은 어디서 퍼왔을까?
수원화성 내의 연못은 성을 쌓기위해 판것
2015-07-16 18:13:42최종 업데이트 : 2015-07-16 18:13:42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성은 있는데 못을 파지 않는 것을 군사상의 단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 자체가 이미 산을 의지하고 있는데, 못을 어떻게 사방에 두를 수 있겠는가? 화성을 처음 쌓으려고 할 때에 주략에 따라, 먼저 성 둘레에 못을 파야 할 곳을 구하고, 그 흙은 성 쌓는 데에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남쪽 성 밖과 북문 옆에는 자연적으로 깊은 도랑이 있고, 서산의 뒤와 동성의 아래에도 자연적인 해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성 둘레에 다시 도랑을 파지 않더라도 저절로 지형에 따라서 견고한 성 구실을 하게 되어 있다.'
'화성성역의궤'의 내용으로, 성 밖이 자연적인 해자가 있으므로 특별히 못을 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못을 파서 그 흙으로 성을 쌓는데 이용한다는 것이다.

수원화성 축성, 흙은 어디서 퍼왔을까?_1
서북공심돈 옆의 성 안, 2단으로 흙을 돋구었다.

'성의 높이는 2장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산 위에서는 그 5분의 1을 감하고 모두 돌로 쌓았다... 성 두께는 아래는 대체로 5장 쯤 되고 위는 줄어들어 거의 3장정도 된다... 성터를 따라 흙을 돋구었는데 그 너비는 약 4~5장 쯤 되었다.' 

수원화성을 성 안쪽에서 답사하다보면 성터를 따라 흙을 돋구어 길을 낸 것을 볼 수 있다. 성 밖에서 봤을 때 여장을 제외한 성곽 높이만큼 흙을 돋군 것이다. 그 엄청난 양의 흙을 어디에서 조달했는지 궁금해 추적해 봤다. 팔달산을 중심으로 한 산성 부분과 화홍문에서 연무대 방향, 동남각루에서 남수문 방향은 산의 경사로 인해 흙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나머지 성곽 부분은 흙이 많이 필요했다. 

화성성역의궤 '어제성화주략'에 보면, '셋째는 호참을 파는 일이다... 평지에다 흙으로 성을 쌓는다면 흙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이제 마땅히 호를 파서 거기에서 나온 흙을 취하여 써야 할 것이다. 호를 파되 만일 너무 성에 가깝게 하면 흙이 점점 무너져서 성 밑이 단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성과 3~4장 정도 띄어서 땅을 긁어 파야한다. 
이렇게되면 흙을 운반하는데 거리가 약간 먼 것이 단점이지만 근심할 만한 것은 못된다. 호를 파되 깊이는 약 1장 5척, 너비는 지표면에서는 약 7장으로 하고 점점 좁혀서 바닥에 이르러서는 사방 3장이면 된다. 이 안에서 파낸 흙은 그것으로 산을 만든다면 성과 맞먹게 될 것이다.'

수원화성 축성, 흙은 어디서 퍼왔을까?_2
성벽을 걷는 길, 너비는 약 2미터 정도 된다.

이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성 밖에 못을 파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인데, 수원화성은 성 밖에 해자에 해당하는 못을 팠다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그 많은 흙을 퍼왔을까? 성벽을 쌓은 돌의 기록은 숙지산 돌이 81,100여 덩어리, 여기산 돌이 62,400여 덩어리, 권동의 돌이 약 30,200여 덩어리, 팔달산 돌이 약 13,900여 덩어리로 자세한 반면 흙에 대한 기록은 없다.

화성성역의궤 '시일'의 '가려뽑은 날짜'와 '각 항목별 날짜'에서 흙의 행방을 찾아보자.
'가려뽑은 날짜'에서 '갑인년(1794) 정월 초 7일 묘시에 석재를 뜨는 공사를 시작하고, 25일 묘시에 성터를 닦다. 2월 28일 진시에 장안문, 팔달문, 화홍문, 남수문을 지을 터를 닦다.' 화성성역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각 항목별 날짜'에서 '갑인년(1794) 3월 초 1일 도랑 치는 일을 시작하다. 14일 상남지(上南池)를 파기 시작하다. 16일에 북지(北池)를 파기 시작하다. 29일에 도랑치는 일을 마치다. 4월 초 1일 상남지 파는 것을 마치다. 초 4일 북지 파는 것을 마치다. 초 7일 하동지(下東池) 파는 것을 시작하다. 북성(北城, 장안문의 동서편)을 쌓기 시작하다. 16일에 남성(南城, 팔달문의 동서편)을 쌓기 시작하다. 21일 하동지 파는 것을 마치다.'

수원화성 축성, 흙은 어디서 퍼왔을까?_3
서북공심돈에서 장안문까지 이어진 흙으로 돋구어진 길

화성성역을 시작하자마자 돌을 뜨는 공사를 시작했고, 터를 닦으면서 도랑 치는 일과 성 안의 연못 파는 공사를 했다. 도랑 치는 일은 수원천을 준설한 것인데 거기서 나온 막대한 양의 모래와 자갈을 성을 쌓는데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홍문과 남수문터 닦는일을 제일먼저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어서 상남지, 북지, 하동지 파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연못을 파는게 화성성역보다 중요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먼저 공사를 시작한 것은, 연못에서 나온 흙을 성을 쌓는데 이용하기 위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연못을 판 이후 북성을 쌓기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수원화성에는 크고작은 다섯 개의 연못을 팠다. 남쪽성을 쌓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상남지와 하지에서 파낸 흙의 양은, 연못의 규모로 봐서 약 7600여톤이 된다. 25톤 트럭 304대 분량이다. 북쪽성을 쌓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북지에서 파낸 흙의 양은, 약 1300여톤, 동지와 하지에서 파낸 흙의 양은 약 7300여톤이 된다.
장안문에서 서북공심돈 까지는 평지에 성을 쌓았고 그 거리는 약 424보 이다. 성 밖은 돌을 쌓았고, 성 안쪽은 흙을 다지며 돋구었는데 그 흙의 양을 계산해 보면 약 8600여톤 정도 된다. 어림잡은 계산으로 볼 때도 다섯 개의 못에서 파낸 흙으로 성을 쌓는데는 충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상당한 양의 흙을 다른 곳에서 조달했을 텐데, 그곳이 만석거가 아닐지 추측해 본다. 

수원화성 축성, 흙은 어디서 퍼왔을까?_4
서북공심돈, 흑이 2단으로 돋구어 졌는데 각 단은 2미터 정도다

만석거는 1795년 3월 1일 축조를 시작해 5월 18일 완성했다. 만석거의 규모는 둘레가 1022보, 깊이가 얕은 곳은 7척, 깊은 곳은 11척 이다. 이곳에서 나올 수 있는 흙의 양을 단순하게 계산해보면 척의 길이를 20cm로 했을 때는 약 21만톤이고, 화성성역의궤에 있는 것처럼 척의 길이를 포백척인 46.7cm로 했을 때는 약 52만톤 이다. 

이런 계산은 화성성역의궤에 나와 있는 연못의 규모를 참고했는데 예를 들면, 상남지는 사방 40보, 깊이는 6척, 가운데 섬이 있었는데 섬의 크기를 알 수 없어 섬이 없는 것으로 계산했다. 책에 있는 조선시대의 단위를 현재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는데 있어, 관계 전문가들이 사용한 단위와 길이는 제각각이어서, 2009년 수원시 지적팀에서 수원화성을 GPS를 이용해 실측한 결과인 1척 20.13cm를 기준으로 삼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수시로 답사하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을 하려고 한다. 이번에 흙에 대한 것을 추적하는데 도량형을 어떻게 하느냐가 난해한 문제였다. 
다행히 GPS 실측 기록을 찾았지만, 화성성역의궤 내에서도 주척인 20.45cm를 사용하기도 하고, 포백척인 46.703cm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 도량형의 기준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앞으로는 실측 기록인 1척 20.13cm로 통일해서 사용하기를 바란다.

 


한정규님의 네임카드

수원화성, 상남지, 하남지, 동지, 북지, 만석거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