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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사지와 창성사 궁금하여 찾아가니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 돌아와야 한다는 주지스님
2015-06-16 06:41:52최종 업데이트 : 2015-06-16 06:41:52 작성자 : 시민기자   이대규

얼마 전 광교산 보리밥 집에 갔을 때였다. 인근에서 '광교산창성사'라는 절을 보았다. 그때 광교산 종루봉 아래 6부 능선 골짜기의 파란 포장 덮힌 언덕이 떠오르며 그곳과 필시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창성사지'로 발굴 중인 그곳과 상광교 버스종점 부근 산 아래 지금 있는 이 절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 후 숙제를 풀어볼 요량으로 전화를 해본 것이다. '창성사지'와'창성사'가 헷갈린다며 어떤 관련이 있는가 알고 싶다고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지스님은 그런 얘기라면 찾아와서 하는 것이 좋겠단다. 발로 뛰지 않고 앉아서 얻으려는, 미쳐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질문도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은가. 준비 없이 불쑥 찾아갔다가 야단을 맞을지도 몰라 최소한의 공부는 해야 할 것 같았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발굴할 것이라는 것, 그곳에 방치되어 오던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를 1965년 6월9일에 현재위치인 매향동 방화수류정 부근에 옮겨놓았다는 것도 알았다. 

창성사지와 창성사 궁금하여 찾아가니_1
창성사지와 창성사 궁금하여 찾아가니_1

그러나 창성사는 언제 건립되었으며 왜 폐사되었는지 모른다는 것과 병자호란 때 광교산에서 김준용 장군과 격돌한 청군에 의해 불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목은 이색이 지은 비문 (1386년)과 '둔촌유고'(1410년) 태종실록(14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등에서 창성사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이후 수원부 읍지(1793년)범우고(1799년)에서도 다시 창성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용주사본말사지'(1984년)와 '전통사찰총서'등 최근의 기록에는 '광교산 봉녕사' 또한 창건당시의 이름이 창성사라는 것이다. 그러다가1400년경에 봉덕사로 개칭하였으며, 조선 철종 때는 혜각신미 스님이 증수하고 봉녕사가 되었지만 봉녕사의 원찰은 지금의 팔달구 우만동의 위치가 아닌, 광교산 중턱의 갈대밭으로 추정되며 더 이상의 근거는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갈대밭이라면 산 중턱은 아닌 것 같고, 현재의 봉녕사라면 광교산의 갈대밭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의 종루봉 아래 발굴지를 창성사지로 추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진각국사대각원조탑'이 그곳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탑에는 진각국사(1307-1385)가 13세에 불가에 입문하여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치악산에 은거하던 중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 '국사대화엄종사선교도총섭'(國師大華嚴宗師禪敎都總攝)에 봉하였고, 이후 '영주 부석사'를 중건하고 '광교산 창성사'에서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을 담아 고려 우왕12년(1386년)'창성사'에 세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상광교 버스종점 부근의 광교산창성사라는 절과 어떤 관련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창성사지와 창성사 궁금하여 찾아가니_2
창성사지와 창성사 궁금하여 찾아가니_2

흐린 날씨 속에 비 예보가 있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창성사 일주문에 들어섰다. 버스종점에서 불과 몇 미터의 거리였지만 속세를 벗어나 깊숙한 절간에 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적이 끊긴 대웅전 옆문을 열고 들어가니 향내 은은한 법당은 정적만 가득했다. 
법당을 나와 요사채 댓돌에 벗어놓은 신발 몇 켤레를 보며 기웃거리자 문이 열린다. 파리하니 여승은 알고 보니 주지스님이었다. 마침 차탁을 앞에 놓고 다른 손님과 대화중인 것으로 보였지만 내게도 차 한 잔을 따르며 용건을 묻기에 창성사지와 창성사와의 관계가 궁금하여 왔노라고 하였다. 

스님은 여기가 창성사라고 단호히 말했다. 여러 가지 증빙들이 나왔으며, 앞으로도 그 여지는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웅전 앞의 밭에서 나온 종루의 주춧돌이나 그 옆 광의 기단석을 보았냐고 물었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서 불상 뿐만 아니라 대종도 실려 나간 것으로 전해진다고 했다. 그런 증언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이 마을 노인에 대해 내가 묻자 스님은 말했다. 노인께서는 이제 아흔 네 살인데 기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귀찮게 하여 절대로 만나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 창성사는 1968년에 혜찬스님이 창건하여 법성사였던 것을 2010년 중수 후 광교산창성사로 개명했다고 인터넷 검색에는 나온다. 하지만 이곳 혜찬스님 (현주지스님)은 사실과 다르단다. 법성사 이전에도 토굴처럼 기도하는 스님이 계셨다고 했다. 또 법성사를 창건한 것은 앞서 다른 스님이며 자신의 은사스님께서 1976년 이곳에 와계시다가 1982년에 혜찬스님 자신이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동안 절 주변 밭농사를 짓던 주인은 이 땅이 옛 절터였으므로 절에 팔아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게 되었고, 마침내 창성사라는 증빙자료들을 확보하기 위해 그 자손들로부터 최근에 매입하게 되었다고 했다. 

창성사지와 창성사 궁금하여 찾아가니_3
창성사지와 창성사 궁금하여 찾아가니_3

그러면서 출토된 부도탑의 파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었고, 후배 스님의 입장에서 잘 보살필 의무가 있다고 했다. 해외에 도둑맞았던 유물들도 귀국하는데 못 돌아오고 있는 보물 제14호 진각국사대각원조탑이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돌볼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이제는 지킬 곳에서 지켜야 한다고 했다. 광교산은 우리나라 팔대 명산중의 하나라는 것과 지금의 '창성사'위치가 광교산의 중심으로 89암자를 거느릴 수 있는 본 찰의 자리라는 것이다. 

또 진각국사께서 입적한 곳이 창성사라고 하지만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께서도 암자에 계셨지 본 찰에 계셨냐며, 그곳이 창성사 본찰 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 광교산은 우리나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창성사 진각국사와 서봉사 현오국사가 나온 명산임을 자랑하며, 이곳 창성사 주변의 발굴과 증빙을 토대로 창성사의 복원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개명하게 되었다고 했다. 

창성사지와 창성사 궁금하여 찾아가니_4
창성사지와 창성사 궁금하여 찾아가니_4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어떨지가 궁금했다. 다행이 수원박물관 학예팀장 한동민 박사와 연락이 되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창성사라는 사찰의 명칭은 종단에서 하므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물 제14호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는 현실적으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옮길 수 없으며, 현재 발굴중인 창성사지가 밝혀지더라도 문화재청에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는 현재의 위치에서도 50년의 세월이 흘렀다며 이 또한 역사 문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혜찬 스님께서 모든 가능성을 두고 발굴 자료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다며, 당장은 어렵겠지만 앞으로는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겠냐는 전망이다.
그러면서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는 돌아간다 해도 원래의 자리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현재 발굴중인 창성사지는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으며, 지난 2007년과 2008년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할 때 총 6단의 석축을 확인한바 있다고 했다. 
또 육안으로도 초석과 장대석, 우물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절터 남동쪽으로 일제강점기 총독부에서 세운 진각국사탑비의 표석이 나왔다고도 했다.

현재는 수원박물관과 한신대박물관이 함께 지난 2014년부터 2016까지를 목표로 '창성사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며, 이번 조사를 통해 보다 정확한 사찰규모와 성격 및 유물들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역사 문화는 나라의 얼굴이며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빛내는 것은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밝은 미래에 대한 도약의 발판이기에 학자들은 그토록 열광하며 매달리게 되지 않을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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