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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창성사 터에서 천년의 바람을 맞다
2014-11-30 11:03:20최종 업데이트 : 2014-11-30 11:03:20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발굴단이 조심조심 파헤쳐 간
흙 속에는 돌멩이들 속에는 
기와 조각도
깨진 사기그릇도
잠자러 들어간 애벌레들도 있지만

잠에서 아우웅 기지개 하며 깨어난
천 년 전의 바람과
그때 그 가을 햇살도 보였다

푸스스 머리칼 털며 고개 든
생각도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므로 내가 눈을 떴다
감았다
다시 천년 전의 가을이었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문단에 등단해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세(勢)를 날렸다는 김우영 시인의 '출토, 창성사지'란 시(詩)다. 아직 문단에 내 놓지 않은 미 발표작이다. 김 시인이 며칠 전 한 술자리에서 광교산에 대한 단상이라며 시 몇편을 보여 주었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와의 추억을 풀어낸 애틋한 이야기부터 광교산의 서기어린 이야기까지. 이제 곧 이순(耳順), 생각하는 모든 것이 순해져 곧 이해가 된다는 나이가 되어서일까. 시인이 바라본 광교산은 자연에 순응하는 듯 했다. 때론 담담한 사색으로, 때로는 무예24기 검법 중의 한 동작으로서 하늘을 향해 칼을 쳐든 자세인 '조천세(朝天勢)'의 웅혼을 시로 담아냈다.(시인은 실제로 십몇년간 무예24기를 배우면서 진검으로 검법을 연습했다)

광교산 창성사 터에서 천년의 바람을 맞다_1
광교산 창성사 터에서 천년의 바람을 맞다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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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창성사 터에서 천년의 바람을 맞다_2
광교산 창성사 터에서 천년의 바람을 맞다_2

얼마 전, 고려 말 진각국사의 흔적을 찾아 홀로 창성사지를 다녀와 건져 올렸다는 '출토, 창성사지'의 풍경이 궁금해졌다. 29일 오후, 시인의 시상을 쫒아 길을 따라 나선다.
'광교산 창성사지를 찾아서'란 타이틀로 떠나는 생각여정이다. 
상광교 13번 버스의 종점, 시작부터 희한하다. 길 없는 길이랄까. 00농원이라 쓰여 있는 사유지 왼편, 추위를 막아내는 비닐 휘장을 걷어 올리곤 절터를 향해 출발한다. 사적공간과 공적공간의 경계를 지나니 마치 어릴 적 뒷동산에 오르는 듯 정겨운 소로가 보인다.

히야, 우수수 떨어진 낙엽들이 쌓이고 쌓여 발길을 옮길 적마다 푹신하다.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고 하늘에 맞닿아 있는 나목과 상반되는 풍경이 가을 끝,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자연의 변곡점에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순간이다. 
창성사 터를 찾아간다는 것을 잠시 잊는다. 그루터기처럼 홀로 남은 바위에 걸터앉기도 하고, 양지바른 곳을 찾아 하늘을 향해 남은 가을 빛을 흠뻑 들이키기도 한다. 볕이 총총하고 대지는 마치 봄 같다.

사람들이 이 길을 잘 알지 못함일까. 길은 오래전에 만들어진 길이로되 인적 끊겨 한적하다. 손가락 끝이 약간은 시린 이맘때 걷는 길의 묘미를 알 사람은 알 터, 기분 좋게 걷는 길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정신 바짝 차리고 앞으로 전진한다. 까닥하다간 다른 길로 들어설지도 모르는 아리송한 길이기도 하고, 분위기 있는 낙엽 속에 숨겨진 뾰족한 돌멩이들이 언제고 나의 몸을 자빠트릴 수도 있으니. 

약간은 가파른 길의 연속이지만 중간 중간 간간이 너른 터가 보이고, 축대로 보이는 흔적들도 보인다. 아마도, 이곳역시 오래전에 존재했던 절집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진각국사(1305~1382)가 살던 광교산 골짜기에 고려 초까지만 해도 89개 사.암이 세워졌다고 전해지니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수원도호부 불우조'에 의하면 광교산 창성사에 이색이 지은 고려 승려 천희(千熙. 진각국사)의 비명(碑銘)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1799년에 제작된 '범우고'에 '예전에 폐사가 된 것을 이제 수리한다(故廢今修)'(네이버 지식백과-답사여행의 길잡이7 에서 발췌)는 내용에서 추정할 수 있듯 광교산의 상서로운 기운에 여기저기 크고 작은 암자가 19세기까지 존재했을 터이다. 
그 중에 제법 큰 절터였을 고려시대 화엄종의 사찰 창성사지가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이 주변 지역 역시 차후에 문화재 조사가 이뤄지기를 기원한다.

창성사 터가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커다란 바위와 기복처로서 오가는 사람들이 쌓아 올린 돌탑과 만난다. '지금 여기'의 모든 사람들, 주어진 삶에 주인으로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두 손 모아 기원한다. 
평온하다.  마지막 가파른 언덕을 가로 지르니 '창성사터' 표지판이 하늘 아래 힐끗 보인다. 

지금은 방화수류정 오르는 길목으로 옮겨진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의 보물 제14호가 존재했던 곳이다. 그 위세를 짐작케 하는 잘 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속세의 객을 맞아들인다.
'게서 잠시 멈추어라!' 바람소리가 일갈(一喝)하는 듯해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장대석과 주춧돌, 계단석, 우물터 등이 보이고 발굴에 따른 사기편, 와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거나 모아져 있다. 

광교산 중턱 아늑히 자리한 그곳의 한가운데서 눈을 지그시 감는다. 천년의 세월이 바람 되어 휘몰아친다. 시인이 노래한 깨진 사기그릇, 와편, 흙속의 돌멩이들을 불러내어 시공간을 뛰어넘는 울림을 느낀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다.

각종기와와 자기류 이외 글자가 새겨진 유물들, 발굴에 이어 건륭명이 쓰인 청 고종 건륭제 연호 수키와와 범자문 암막새도 드러났다. 앞으로 2016년까지 문화재 발굴조사는 이어진다. 이제 막 시작된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에게 건넬 감동은 더해지리라.

광교산 창성사 터에서 천년의 바람을 맞다_3
광교산 창성사 터에서 천년의 바람을 맞다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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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창성사 터에서 천년의 바람을 맞다_4
광교산 창성사 터에서 천년의 바람을 맞다_4

하산길은 올라 오던 길을 피해 낯선 길을 택한다. 가파르다 못해 위험천만한 길이다. 조심조심, 20여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마을이 시야에 나타난다. 때론 다른 길로 들어서는 것도 이런 행운이 따라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생도 그럴까?

광교산 용머리 마을 '시가 흐르는 마을'이다. 사랑스럽고, 여운 있고, 운치 있는 시(詩)가 마을 길목마다, 집 입구마다 세워졌다. 
태조 왕건이 견훤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길에 '광악산 행궁'에 머물다가 쏟아지는 광채를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이름으로 광악에서 광교(光敎)로 바꿔 광교산이라 했다더니, 창성사 터에 다녀오는 내가 마치 부처님의 은혜를 받은 듯했다. 용머리 마을 아름다운 길을 지나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시인처럼. 
움직이는 것은 몸이 아니라 천년의 바람에 이끌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그곳을 벗어나면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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