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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을 거닐며 역사를 마주하다
문화유산에 깃든 이야기를 상상한다
2023-09-07 09:23:31최종 업데이트 : 2023-09-07 10:48:24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행궁 신풍루. 정조는 여기에서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인 사민과 가난한 사람인 진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사진은 무예 24기 시범 공연 모습.

행궁 신풍루. 정조는 여기에서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인 사민과 가난한 사람인 진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사진은 무예 24기 시범 공연 모습.


 9월에도 불볕더위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래도 행궁동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주말에 나오니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이 많다. 특히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카페로, 음식점으로 다니고 있다. 그러다가 행궁 앞 그늘에 앉아서 이야기를 즐기고 있다. 행궁이 궁금한 듯 기웃거리지만, 선뜻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수원 화성행궁은 여전히 복원 중이기 때문이다. 

더위 탓인지 행궁 안에 관람객이 드물다.

더위 탓인지 행궁 안에 관람객이 드물다.


 수원에 살면서 행궁에 숱하게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동행하는 지인들도 행궁은 규모가 작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뒤지지 않는다. 팔달산 자락에 안겨 있는 모습은 편안하게 느껴진다. 뒤뜰에 굴뚝도 화단의 층계도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 자연과 어울리는 건축물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모습을 지닌 풍경처럼 다가온다. 오늘도 한적한 행궁을 거닐어본다.

봉수당. 정조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마다하고 이곳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연다. 이날 진찬례 모습이 봉수당에 재현돼 있다.

봉수당. 정조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마다하고 이곳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연다. 이날 진찬례 모습이 봉수당에 재현되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할 때 머물던 곳이다. 정궁이 아니라 임시 궁궐이니 규모로 보면 작다. 하지만 화성행궁은 우리나라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로 성곽과 함께 온전하게 남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행궁 중에 왕이 가장 많이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정조는 12년간(정조 13년에서 24년까지) 13차례 현륭원에 다녀갔다. 이후에 순조, 헌종, 고종도 현륭원과 건릉을 찾았다. 그때마다 왕들은 화성행궁에서 머물렀다. 

유여택. 화성 유수 집무실이다. 정조가 화성을 행차했을 때도 이곳에서 신하를 접견했다.

유여택. 화성 유수 집무실이다. 정조가 화성을 행차했을 때도 곳에서 신하를 접견했다.


 정조는 역사의 비극으로 아버지와 일찍 이별했다. 가슴에 속에 한을 묻고 살았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죽음은 붕당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개혁을 통해 국정을 바로잡아야 하는 꿈이 있었다. 정조의 한과 꿈이 수원을 만들었고, 행궁을 만들었다. 행궁의 봉수당도 그런 의미가 있다. 혜경궁 홍씨는 환갑의 나이로 먼 거리 여행이 어렵다. 그런데도 넓고 큰 경복궁과 창덕궁을 마다하고 이곳까지 와서 회갑연을 한다. 이날 진찬례 모습이 봉수당에 재현돼 있다. 연꽃무늬 방석에 혜경궁 홍씨가 앉아 있고, 정조가 술잔을 올리고 치사를 드린다. 그때 어머니에게 절하는 왕의 마음은 어땠을까? 

복내당. 수원 고을 수령과 가족이 거처하는 건물. 한때 도립병원 건물이 들어서서 철거되었던 것을 복원했다.

복내당. 수원 고을 수령과 가족이 거처하는 건물. 한때 도립병원 건물이 들어서서 철거되었던 것을 복원했다.


 회갑 잔치를 치르고 다음 날에는 주민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행궁의 정문 신풍루에서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인 사민(四民)과 가난한 사람인 진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낙남헌에서는 양로연을 열어 비단 한 단씩을 선물했다. 어머니 회갑을 맞아 인근 주민에게 인정을 베풀며 기쁨을 함께하고자 했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원새빛돌봄 서비스가 그렇다. 시는 가족 구성의 변화로 어려움을 겪는 가구 등을 지원하기 위해 사회적 돌봄 체계를 촘촘히 하고 있다. 

행궁 작은 방에서 환관이 글을 읽는 모습.

행궁 작은 방에서 환관이 글을 읽는 모습.


 우리 지역에서 많이 쓰는 '인인화락'이라는 말도 정조가 행궁에서 한 말이다. 1797년 1월 말(정조 21년, 정조실록 46권) 신하들과 성을 순행하고 행궁에 돌아와 "성첩이 완성되었으므로 지금 제일 급한 것은 '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화락하게 하는 것[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의 여덟 글자다."라고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는 국가 정책의 핵심이었다. 이재준 수원특례시장도 취임 후 1,000억 원 규모로 운용될 '수원새빛 기업펀드' 구상 등에 매진하는 이유도 같다. 

행궁 후원의 모습. 팔달산 자락에 오르는 화단과 숲이 아름답다.

행궁 후원의 모습. 팔달산 자락에 오르는 화단과 숲이 아름답다.


 행궁은 왕이 원행 시에 왕의 거처로 이용되었지만, 평상시에는 지방 행정의 관아로 사용했다. 행궁 유여택이 화성 유수 집무실이다. 정조가 화성을 행차했을 때도 이곳에서 신하들을 접견했다. 요즘은 유여택은 문화 공간이다. 2023 세계유산 축전 행사 중에는 여기서 하는 것도 있다. 유여택뿐만 아니라 행궁에서는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린다. 야간 관람, 체험, 공연, 전시 등을 하고 있다. 이런 경험으로 문화유산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새기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화성행궁이 시련을 겪었다. 병원과 경찰서로 사용하면서 여기저기 훼손됐다. 1989년에 '화성행궁복원 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화성성역의궤'를 기반으로 복원 사업을 추진했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1단계 발굴·복원 사업을 했고, 올해 12월 2단계 사업을 끝으로 완료할 예정이다. 행궁 주변이 오랫동안 가림막으로 막혀 있어 불편했는데, 빨리 공사가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뒤뜰에 굴뚝도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

뒤뜰에 굴뚝도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

 
 행궁을 단순히 물리적 구조물로만 보면 똑같은 형태의 건축물이 촘촘하게 붙어 있다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건축물은 조성 당시 완결된 상황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건축물에 관한 이야기를 즐긴다. 행궁에 와서 정조의 개혁 정신과 효심을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깃든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의 현실을 성찰했다. 오래전 궁궐이지만 시간을 뛰어넘는 세상의 키워드를 찾고, 현실을 성찰할 수 있는 동력을 발견한다. 

 행궁은 당시 사람들의 삶과 시대의 요구를 담았다. 우리는 거기에 담긴 생각과 염원을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왔다. 그러고 보면 문화유산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한 시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산물이다. 궁극적으로 현재와 미래를 위해 창조되는 공간이다. 

관광의 고도,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일제강점기 지도에 행궁 대신에 도립병원, 군청, 세무서가 보인다.

관광의 고도,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일제강점기 지도에 행궁 대신에 도립병원, 군청, 세무서가 보인다.


 화성행궁을 규모만으로 보면 정궁과 비교해 초라하게 보인다. 공간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다양한 영향을 준다. 건축이란 시대와 소통하는 건축물이다. 행궁에서 상상력과 감정을 자극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동안 행궁의 공간의 형태와 구조가 주는 시각적 매력만 보았는데, 오늘은 거기에 깃든 이야기를 즐긴다. 풍요로움이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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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 정조, 현륭원, 혜경궁, 사도세자, 수원, 신풍루, 봉수당,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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