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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봄날은 간다
2015-04-24 09:25:47최종 업데이트 : 2015-04-24 09:25:47 작성자 : 시민기자   이명선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며칠 내내 입에서 떠나지 않는 노래다. 노래를 흥얼거릴 일이 좀체 없는데 계속 반복되는 걸 보니 이제 그 봄이 가는가보다 하는데 '봄날은 간다'의 노래 4절이 발표되었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
밤 깊은 시간엔 창을 열고 하염없더라 오늘도 저 혼자 기운 달아 기러기 앞서가는 만리 꿈길에 너를 만나 기뻐 웃고 너를 잃고 슬피 울던 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문수인 시인이 '노인들을 위한 봄날'이라며 새로이 내는 시집 속에 발표했다는 시다.

70의 나이가 된 시인이 '등 굽은 적막에 봄날은 간다'고 표현한 부분이 아릿하다. '나이 먹어 간다는' 의미가 새삼스럽지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그동안 무심히 보아 넘기던 많은 것들이 세세히 눈으로 들어온다
어느 집 마당에 널린 빨래만 보고도 말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빨래를 짜서 탈탈 털어 마당가 빨랫줄에 투덕투덕 널었던 때가 그리워진다. 진달래만 봐도 연분홍 꽃다지 묶음에 하얀 얼굴 들이밀었던 때가, 찔레대공 허연 속살 꺾어 엄마한테 갖다 주던 때가 따갑게 내리는 볕에 수줍은 목련 터지듯 툭툭 터져 나오는데 봄날의 나는 이제 없다.

화성의 봄날은 간다_1
화성의 봄날은 절정이다

이제 봄볕은 한층 따가워졌다. 봄기운을 받아 꽃비를 내리던 벚꽃은 붉은 꽃술도 감추고 어느새 푸른 잎으로 감싸였다. 백설 같은 벚꽃이 떠난 자리엔 다른 꽃들이 만발하다. 그 꽃들 못지않게 길을 걷는 사람들 얼굴에도 화사한 꽃이 피었다. 화성의 이곳저곳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들로 인해 바쁘기만 하다

다정한 연인들의 어깨동무 사이로 나이 드신 분의 걸음만 한없이 느리다. 나무계단 위를 보니 먼저 도착한 할머님이 아래서 올라오는 할아버님을 기다리며 굽은 허리에 손을 대신다. 아직 한참이나 더 올라가야 되는 계단 아래, 할아버님은 그 시간 나도 한창 때는 거뜬했었는데 세월은 거스를 수 없다며 젊은 날의 청춘을 부르고 계실까? 따스한 봄볕은 누구나 불러들여 푸짐한 봄빛의 인심을 보여주니 화성의 성길은 여전히 분주하다.

장안공원 잔디밭은 온갖 꽃물결이다. 서울에서 현장학습을 왔다는 아이들은 짧은 반팔에 맛있는 도시락을 펴놓고 신난다. 아이들이 꽃보다 아름다운 시간이기에 다가가 아는 척을 하니 낯선 아줌마에 대한 경계심도 없이 조잘조잘댄다. 엄마가 싸주셔서 맛있어 보인다는 내말에 이 아이 저 아이 김밥을 집어준다. 아이들이 건네는 김밥을 먹으며 지금이 가장 빛나는 봄날임을 안다

화성의 봄날은 간다_2
가장 이른 봄날의 어린 청춘들

아직 살아가면서 봐야 될 아름다움이 많은 아이들은 걷지 않아도 되는 지금, 친구들과 이야기 하며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되는 이 시간, 엄마의 솜씨가 빛나는 도시락 먹는 지금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우리처럼 시간을 먹은 사람들은 아이들의 빛나는 이마가, 오물거리며 먹는 입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발이, 저 모습이 가장 예쁠 때임을 알고 부러워한다

반대로 아이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어른이 제일 부럽단다. 매일 학교 가고, 학원가고, 숙제에 치여 밤 12시가 넘어 잔다고 투덜댄다. 신데렐라도 12시 전에는 집에 돌아갔다며 우리들은 공부하는 기계라 한다. 공부하기 싫다는 말이 입버릇이 된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어린 날로 돌아가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줄 아냐고 물으면 '공부 열심히 하는 거요' 라고 말한다

그 말에도 이제 익숙해진 아이들이다. 어른도 공부를 한다고 해도 믿지 않으며 그저 편해 보이는 어른으로 빨리 자라고 싶을 뿐이다. 나도 그랬다. 막연히 스무 살만 넘으면 나의 세상이 되고 못잔 잠 실컷 자면서 어른으로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더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으나 그때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내일이란 시간이 환상으로 덮여있을 것이란 로망으로 오늘을 보내며 기다렸다

인생의 황금기인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를 보내면서 매번 언제가 좋은 시절이란 거야, 다 똑같고 힘들기만 한데 하면 더 어른들의 그때가 좋을 때란 말이 이어진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말이 푸릇푸릇한 아이들을 보면 이해가 된다. 얼굴과 지식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는 나이에선 아이들의 잘난 얼굴 못난 얼굴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신선하고 상큼한 봄나물처럼 환하게 피어오른다. 뭘 해도 예쁜 청춘이다.

화성의 봄날은 간다_3
성안과 성 밖에서 만나는 많은 골목길

화성의 성안을 거닐면서 무수히 만나는 골목길이 좋아졌다. 작은 골목길의 끝이 보이지 않아 좋고, 담벼락으로 넘어온 이름 모를 꽃들의 잔치가 반갑고, 구부정한 허리, 흰머리가 먼저 보이는 어른이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친근해서 좋다

그 길 중 사진 하나를 친구에게 보내니 이런 길은 사랑하는 사람과 걸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젊은 날엔 이런 길의 아름다움과 봄날의 시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걸으면 안 된다 했다. 서로가 사랑에 빠진 나이, 젊은 그 날엔 봄이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봄이 보여주는 색을 알아채지 못한다. 둘의 사랑에 눈멀고 귀먹어 자연이 내는 봄의 것들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나만의 개*철학으로 말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봄날은 간다'란 영화에서 나온 말로 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린 날엔 사랑이 변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이는 자연의 모습이 다르듯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데 사람의 마음이 변했다는 논리도 뒤집는 꼬장꼬장함도 나이 먹음이 준 것인지 모르겠으나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말도 내 위안일 뿐이다. 푸른 잔디 광장에서 도시락 먹는 아이들이 예쁘지, 의자에 외로이 앉아있는 노인은 아름다움보단 쓸쓸하게 보여 아름답진 않다. 봄이 가는 길목에서 여름이 펼쳐낼 초록마당을 준비중인 자연에 기대고픈 마음이 한 자락 펄럭이는 봄날이 저만치 가고 있다.
 
화성의 봄날은 간다_4
꽃날이 가면 초록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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