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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수원에서 돌맥을 찾았사옵니다
이야기가 있는 수원 나들이 코스(프롤로그-숙지산 채석장 유적)
2011-11-17 14:18:10최종 업데이트 : 2011-11-17 14:18:10 작성자 :   e수원뉴스

e수원뉴스는 기획시리즈로 주1회 씩 <이야기가 있는 수원 나들이 코스>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물은 수원의 역사와 문화유적, 자연에 스토리를 가미한 것으로 앞으로 수원관광 콘텐츠로 활용되길 바랍니다. 
-e수원뉴스 편집실-


전하, 수원에서 돌맥을 찾았사옵니다_1
전하, 수원에서 돌맥을 찾았사옵니다_1

정조가 수원에 화성(華城)을 세우기로 한 후 조정 대신들은 연일 불만이었다.
"멀쩡한 한양을 놔두고 굳이 수원에 성을 쌓는다니 이런 낭비가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화성 설계를 정약용에게 맡긴 것도 불만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뭘 안다고 성 설계를 맡긴단 말입니까?"
"새파랗건 새빨갛건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왜 하필 남인 출신이냔 말입니까?"
"뿐입니까? 우리 노론과 원수지간인 윤선도 집안 사람이니 더 화가 나지요."

더구나 사도세자 구명에 앞장서면서 사사건건 노론과 대립해 온 채제공이 영의정을 제수 받고, 화성 건설 총책임자로 임명되자 노론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더 기가 막히는 건 성을 돌로 쌓는다는 겁니다."
"아니, 성을 돌로 쌓으면 튼튼하고 좋지 않을까요?"
"좋은 걸 누가 모르나요? 문제는 수원에 돌이 없다는 겁니다."
"아니, 돌도 없이 어떻게 석성을 쌓는단 말이오?"
"그러게 돌대가리들이지요."

사실 그건 정조도 고민이었다. 이대로 돌을 구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석성 쌓는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정조는 경모궁에 앉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기도를 올렸다.
"아버지. 아버지 묘소를 쓴 그곳에 단단한 석성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전하, 수원에서 돌맥을 찾았사옵니다_2
전하, 수원에서 돌맥을 찾았사옵니다_2

바로 그때, 밖에서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기뻐하소서! 돌맥을 찾았사옵니다! 수원에서 돌맥을 찾았사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숙지산, 여기산, 권동, 그리고 팔달산에서 갑작스럽게 돌맥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숙지산과 여기산에 각각 2개씩, 그리고 권동에 1개의 채석장을 만들었다. 숙지산에서는 8만1100덩어리, 여기산에서는 6만2400덩어리, 권동에서는 3만2000덩어리의 돌을 얻었다. 팔달산에서도 1만3900덩어리의 돌을 캐내어 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루는 채제공이 의미 있는 말을 했다. 

"전하!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묘한 인연이옵니다. 제일 큰 채석장이 있는 숙지산의 이름 숙지(熟知)가 '깊이 안다'는 뜻이온데, 실제로 풍성한 돌맥을 오래오래 감추고 있다가 갑자기 드러내 놓지 않았사옵니까? 더 재미있는 건 숙지산과 여기산이 모두 공석면(空石面)에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석(空石)이라면 '돌이 비다'는 뜻이옵니다. 실제로 화성을 쌓느라 돌을 다 캐내어서 숙지산과 여기산에는 돌이 없사옵니다. 꼭 이리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사옵니까?"

정조는 다시 사도세자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이렇게 또 도와주시는군요. 소자, 아버지가 주신 돌들로 튼튼한 석성을 쌓아 올리겠사옵니다. 지켜봐 주시옵소서."

위기에 빠졌던 화성 축성을 가능하게 해 준 숙지산은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산 41번지 화서전철역 부근 옛 전매청 연초제조창(현 KT&G 수원지점)의 건너편에 있다. 지금도 숙지산 여러 곳에는 채석장이 분포되어 있는데 특히 채석 당시의 쐐기 자국이 여러 곳에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수원시 향토 유적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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