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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문, "과연 사통팔달의 요지로구나"
이야기가 있는 수원 나들이 코스(2-팔달문)
2011-11-25 11:07:03최종 업데이트 : 2011-11-25 11:07:03 작성자 :   e수원뉴스

e수원뉴스는 기획시리즈로 주1회 씩 <이야기가 있는 수원 나들이 코스>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물은 수원의 역사와 문화유적, 자연에 스토리를 가미한 것으로 앞으로 수원관광 콘텐츠로 활용되길 바랍니다. 
-e수원뉴스 편집실-


팔달문, 과연 사통팔달의 요지로구나_1
팔달문, 과연 사통팔달의 요지로구나_1


흔히 수원사람을 '깍쟁이'라고 한다. 화성의 남쪽문인 팔달문은 바로 이 '깍쟁이'라는 단어의 고향이다. 그 비밀은 '팔달문'이라는 이름 속에 있다.

정조는 유독 이 화성의 남문을 사랑해서 직접 상량문을 써 주었다. 상량문에는 "돈과 곡식과 군사가 없는 곳이 없고, 선비와 농사꾼과 장사치가 반드시 여기에 있네."라는 구절이 있다. 
실제로 팔달문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상인들이나 과거를 보러 오는 선비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관문으로 교통과 물류의 요지였다.  

"과연 사통팔달의 요지로구나. 부디 이 문으로 사람과 물자가 한없이 밀려들어오기를 바라노라."
그리하여 정조는 이 문에 '팔달문'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농업만큼이나 상공업을 진흥시켜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믿었던 중상주의자 정조는 이렇게 이름을 지어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팔달문에 시장을 열었다. 

팔달문, 과연 사통팔달의 요지로구나_3
팔달문, 과연 사통팔달의 요지로구나_3


그리고 수원 부사 조심태의 건의로 6만5천냥을 풀어 수원백성들에게 밑천을 대 주어 팔달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수원에는 가게와 상인이 많이 늘어나 두 집 건너 한 집이 상점이었다. 

당시에는 가게를 '가가',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을 '가가쟁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타지방 사람들이 수원사람을 보면 "당신도 가가쟁이오?"하고 물었는데 이것이 변해서 '깍쟁이'라는 말로 굳어졌다.

그러니까 이 팔달문은 수원 깍쟁이의 고향인 셈이다. 상업이 번성하니 자연히 부자도 많이 났다. 수원 팔부자로 꼽히는 대부호들을 중심으로,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세력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았던 곳도 팔달문 근처이다. 그래서 팔달문은 풍요와 번영의 문으로 불린다. 

지금도 팔달문 인근에는 팔달문시장, 지동시장, 못골시장, 미나리광시장을 비롯한 9개의 재래시장이 밀집해 있어 정조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팔달문, 과연 사통팔달의 요지로구나_2
팔달문, 과연 사통팔달의 요지로구나_2


팔달문은 기초가 튼튼한 문이다. 원래는 기초공사 때 3.2미터를 파기로 했는데 공사 중에 물이 나오자 4.5미터를 파서 모래와 석회로 단단하게 다지고 벽돌을 3층으로 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성을 들인 탓인지 팔달문은 복잡한 근현대사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고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현재 보물 402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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