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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백성을 깊이 사랑한 임금이었다. 자신은 평생 하루 두 끼씩만을 먹고 고기도 입에 대지 않으면서 백성들만은 배불리 먹이고 싶어 했다. 만석거 광교산에서 파장동 일대를 흐르던 진목천 개울을 잘라내어 방죽을 쌓아 물을 채우고, 물의 흐름을 통제하는 수문을 내어 두 달 만에 저수지를 완공할 수 있었다. 둘레 약 1226m, 가장자리 수심 210㎝, 가운데 수심 330㎝로 상당히 규모가 큰 규모의 저수지였다. "우와, 이 큰 저수지 좀 봐. 우리 수원에 이렇게 물이 많았어?" "이 근처의 작고 작은 물줄기를 모두 모은 거래." "야, 꼬맹이 오줌줄기 만한 개천도 이렇게 모이니까 커다란 저수지가 되는구나." 커다란 보물상자를 바라보듯 백성들은 뛰는 가슴을 안고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수지 이름이 뭐래?" "만석거(萬石渠)!" "만석거? 그게 무슨 뜻이야?" "이런, 무식한 놈 같으니. 곡식을 만석이나 거둔다는 뜻이잖아." "여기서 곡식을 만 석이나 거둔다고?" "아, 전하가 저수지를 왜 만드셨겠어? 뱃놀이하려고? 헤엄치려고? 인제 여기다가 커다란 농장을 지으실 거래. 쌀 만 석을 거둘 수 있는 커다란 농장을!" "히야아...". 만석거(萬石渠)!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사는 것. 그러나 정조가 바라는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기껏 땀흘려 농사를 지어도 마름과 지주에게 이것저것 다 떼이고 나면 늘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착취당하는 소작농이 없어져야 한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것을 수원에서 시작해 보자." 저수지가 완공되자 정조는 1만 2660냥을 풀어 만석거 주위에 논을 사고, 개간 작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109섬 14마지기나 되는 논이 생겨났다. 정조는 이곳을 '대유둔(大有屯)'이라 이름 짓고 국영농장으로 운영했다. "수원 백성들 중 전답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유둔의 논을 빌려 주도록 하라. 농사를 지어 100중 30만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70은 농사를 지은 자가 갖도록 하라." 정조의 말에 수원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들었어? 7:3이래. 나라에 3만 주고 나머지 7은 우리가 갖는 거래." "그러니까 전하가 우리 지주가 되시는 셈이네." "하하, 부처님 같은 지주를 모셨으니 우리는 살판났네, 그래." "이제 허리 펴고 살겠구만. 농사짓느라 허리 굽혀, 마름 앞에 굽신거려, 지주 앞에서 설설 기어, 도대체 허리 펴고 살 날이 없었는데 말이야." "이젠 아예 몸을 뒤로 젖히고 다니시게나, 하하하." 이제는 농장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정조는 농사에 관심이 많고, 백성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은 양반을 뽑아 둔도감으로 임명했다. 둔도감은 대유둔의 초지와 농사 과정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 밑에는 마름이 1명, 사령 2명, 권농 1명을 두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소가 필요했다. 정조는 다시 200냥을 풀어 소 10마리를 사 들이고, 화성 축성 작업에 참여했던 소 32마리를 합해 총 42마리의 소를 대유둔 경작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세금 없이 쓰게 했다. 정조는 기록의 왕이었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주의자인 그는 크고 작은 모든 행사와 정책의 과정과 결과를 낱낱이 기록하도록 했다. 대유둔에도 그 원칙이 적용되었다. 논을 경작하는 사람의 이름, 경작하는 땅 크기 등 모든 내용을 기록한 토지대장을 만든 것이다. 만에 하나 둔도감과 마름 등이 정부의 눈을 피해 백성들을 부당하게 착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부정부패를 방지해 놓으니 백성들은 신명나게 농사에 전념할 수 있었다. 만석거에 아직 새벽달이 남아 있을 무렵부터 백성들은 농기구를 들고 지고 대유둔으로 몰려들었다. '음머 음머' 소들의 울음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고, 그 소리에 화답하듯 만석거 물결이 일렁였다. 해 뜨기 전부터 일몰까지 백성들은 쉬지 않고 일했다. 새참을 먹고 나면 만석거에서 멱을 감기도 했다. "여보게들, 우리 이 달 보름에는 현륭원에 가 보지 않겠나?" "현륭원이라면 사도세자의 묘소?" "그래. 우리 전하의 아버지시잖나. 전하가 아버지 생각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가. 우리가 거기 가서 잡초라도 뽑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잡초야 참봉이 알아서 뽑으니까 우리는 현륭원 소나무 숲에 송충이나 잡으러 가세." "송충이?" "아, 자네 못 들었나? 전에 전하께서 현륭원에 행차하셨는데 송충이들이 소나무 숲을 다 망가뜨려놨더래. 그래서 우리 전하가 너무 화가 나셔서 송충이를 잘근잘근 씹으셨다잖아." "효자 임금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전하 덕분에 논까지 생겼으니 우리도 은혜를 갚아야지." "그래야지. 이달 보름에는 다들 송충이 잡으러 가세." 현륭원 말을 마친 백성들은 조용히 만석거 깊은 물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비극적으로 잃고 암살 위기를 몇 번이고 넘으면서도 보위에 오른 왕, 하루 두 끼만 먹고, 거친 삼베옷을 입은 채 하루 종일 백성만 생각한다는 왕, 그 왕의 깊은 마음속을 헤아려 보려는 듯 그들은 물속을 바라보았다.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 임금과 백성의 마음은 물길처럼 이어지고 만석거처럼 깊어 갔다. 만석거가 완성된 그해, 전국은 다시 큰 가뭄이 들었다. 그러나 대유둔만은 누렇게 익은 벼들로 황금들판을 이루었다. 모두들 자기들 논이라는 생각에 신명나게 일한 결과이기도 했고, 정조가 부지런히 거름을 만들어 지력(地力)을 키워 둔 덕분이기도 했다. 백성들과 장용영 군사들은 북과 꽹과리, 징을 울리며 한판 잔치를 벌였다. 이후 만석거 옆 대유둔에서 물결치는 황금색 벼의 장관은 '석거황운(石渠黃雲- 만석거의 황금빛 구름)'이라 불리며 수원팔경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왕과 백성이 함께 부른 풍년가_2 사실 수원 토박이들은 이곳을 '교구정 방죽', '조기정 방죽', '조개전방죽'이라고도 부른다. 이 저수지가 이렇게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된 연유를 알고 싶다면 저수지 남쪽에 자리한 정자를 찾아가야 한다. 영화정(迎華亭) 영화정 그런데 훗날 이 정자는 '교구정(交龜亭)'으로도 불리게 되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어이, 온다, 와!" 대유둔의 백성들이 교구정 쪽에 모여들었다. 오늘은 새로운 수원유수가 오는 날이다. 교구정 정자 앞에는 관리들이 행렬을 지어 서서 새 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만석거 저쪽에서부터 새로 부임하는 유수의 행렬이 나타났다. "보여요?" "응. 이번 유수는 인물이 아주 좋은데~" "아이구, 여보, 나도 좀 봐요." "아니, 이 여편네가 갑자기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흥! 오랜만에 눈 호강 좀 하려고 해요. 잘못됐어요?" 새 유수가 도착하자 옛 유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함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반쪽짜리 돌거북이었다. 이윽고 새로 온 유수도 품에서 돌거북을 꺼냈는데 역시 반쪽짜리였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거북이를 맞춰보았다. 반쪽짜리 거북이 두 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들어맞았다. 그러자 옛 유수와 새 유수가 경건하게 맞절을 했다. 이것은 수원 유수들의 임무교대식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교구정(交龜亭)이라고 불렀다. '거북이를 교환한다'는 뜻이었다. 그 바람에 교구정 옆에 있는 만석거도 덩달아 교구정 방죽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다 '교구정(交龜亭)'이 잘못 발음되어 '조기정'으로 알려지면서 만석거 이름은 졸지에 '조기정 방죽', 또는 '조개정방죽'으로 와전되게 되었다. 그러다 '일왕저수지'로 불리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1936년 10월 1일을 기점으로 이 일대가 행정구역상 '일왕면(日旺面)이 되면서 만석거 역시 일왕저수지로 불리게 되었다. 정조 시대에 황금 벼이삭이 춤을 추던 대유둔 지역은 이제 아파트가 들어서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영화정에 앉아 만석거 수면에 저녁놀이 깔리는 모습을 바라보면 정조와 백성들이 함께 부른 풍년가가 들려올 것만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