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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하는 '장안문' 이야기
자세히 알고 보니 더 아름다워
2023-05-11 11:20:05최종 업데이트 : 2023-07-07 14:24:10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장안문. 돌로 쌓은 대와 그 위에 2층 문루를 세웠다. 돌을 다듬어 정연하게 쌓았는데, 성벽과 어울린다.

장안문. 돌로 쌓은 대와 그 위에 2층 문루를 세웠다. 돌을 다듬어 정연하게 쌓았는데, 성벽과 어울린다.


  정조는 현륭원을 조성하고 해마다 참배 길에 올랐다. 화성 건설도 능행을 위해 한 것이다. 그때마다 장안문 앞에서 화성 유수의 영접을 받았다. 1795년 을묘년 화성 행차는 특별했다. 혜경궁 홍씨와 조정 대신들까지 약 6천 여명이 수원화성에 도착했다. 

  시흥 행궁에서 하루 묵고 장안문에 도착한 사람들은 입이 딱 벌어졌다. 규모가 한양 숭례문보다 컸다. 전면에 반원형의 옹성이 있고, 다시 문이 있다. 성문이 큼지막하고, 출입문이 가운데 있어 많은 인원이 거침없이 통과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만 보다가 신소재 벽돌로 옹성 전체가 만들어진 것도 처음 봤다. 홍예문은 더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문짝은 두꺼운 널에 쇳조각을 붙여 튼튼하게 보였다.

서쪽에서 본 장안문 문루. 장안문은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화려하고 웅장한 자태를 가까이 볼 수 있다.

서쪽에서 본 장안문 문루. 장안문은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화려하고 웅장한 자태를 가까이 볼 수 있다.

 
옹성을 지나니 장안문이 버티고 있다. 돌로 쌓은 대와 그 위에 2층 문루를 세웠다. 돌을 다듬어 정연하게 쌓았는데, 성벽과 어울린다. 대 위에 성가퀴를 돌리고 활을 쏘는 구멍을 뚫어놓았다. 옹성도 마찬가지다. 평평한 구멍과 경사진 구멍을 교차시켜 멀리 있는 적이나 가까이에 침투한 적을 쏠 수 있게 했다. 기능성과 예술성을 갖춘 최고의 성문이다.

  우진각 지붕은 궁궐과 도성의 정문과 같은 격식 높은 건물에 쓰였는데, 숭례문과 창덕궁의 돈화문 지붕이 그렇다. 추녀마루 위에 잡상들은 천연덕스럽게 하늘을 보고 있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겠다는 의지만은 단단해 보인다. 문루 처마 밑에 다포 장식에도 눈이 휘둥그레진다.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다포는 처마 끝의 하중을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장안문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 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 굉흡이 건설을 도왔다.

  장안문은 179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했다. 완공은 그해 9월 5일이다. 이는 사대문 중에 가장 먼저기도 하지만, 화성 전체공사 일정에서도 앞섰다. 북쪽 문이지만 한양으로 오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정문 역할을 했다. 장안문으로 부른 것은 서울 장안과 통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옛 중국 수도인 장안의 이름도 연상하게 한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이 융성했던 것처럼, 화성의 백성들이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장안문 문루 처마 밑에 다포 장식.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다포는 처마 끝의 하중을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장식적 기능도 있다.

장안문 문루 처마 밑에 다포 장식.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다포는 처마 끝의 하중을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장식적 기능도 있다.


  위풍당당한 장안문 밖에는 새로 조성된 민가도 보인다. 이곳 사람들은 구읍에서 이전해 오면서 걱정도 있었지만 새로운 땅에 대해 거는 기대도 컸다. 새로운 도시에서 이전보다 나은 삶을 꿈꾼다.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와 주막거리도 떠들썩하다. 한양에서 온 사람들은 화성과 그 시설의 웅장함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원사람들은 왕과 고관대작들, 군사들과 궁녀 등 행차 규모를 보고 놀랐을 것이다. 

장안문 문루에 호로전안. 호리병 모양의 구멍으로 병사들이 활을 쏜다.

장안문 문루에 호로전안. 호리병 모양의 구멍으로 병사들이 활을 쏜다.


  정조 이후에도 왕들은 융건릉 행차를 위해 수원 화성에 왔다. 그때마다 장안문을 통과하여 종로에서 우회전을 해 행궁에 들어갔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장안문은 역사에 없는 수난을 당한다. 수원은 남쪽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다. 그렇다 보니 전선의 한복판에 들어서고 말았다. 성곽 일대가 폭격의 대상이 되었고, 그 중심에는 장안문이 있었다. 장안문 문루가 무너진 사진 하나만 봐도 당시 전쟁의 참상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부서진 성곽을 보고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 있고 북문은 부서지고 남문은 남았다"라고 하면서 냉소적으로 표현했다. 

장안문 전면에 있는 반원형의 옹성. 성문이 큼지막하고, 출입문이 가운데 있어 을묘원행 당시 많은 인원이 거침없이 통과했다.

장안문 전면에 있는 반원형의 옹성. 성문이 큼지막하고,
출입문이 가운데 있어 을묘원행 당시 많은 인원이 거침없이 통과했다.

 
무너지고 방치된 수원 화성은 1975년 장안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복원이 시작됐다. 화성성역의궤의 도면이 복구의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복원하지 못한 것이 있다. 정조가 "성역의 공적을 기록하는 처사가 있어야 하겠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없다. 실제로 수원 화성 4 대문의 바깥쪽 성벽에는 감동, 패장 등 공사 관계자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공사 담당자를 존중하는 의미다.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에는 당시 실시한 건축 실명제도 흔적이 남아 있다. 장안문에는 볼 수 없다. 6·25 전쟁으로 유실된 것으로 추정한다. 
 
옹성 성가퀴. 평평한 구멍과 경사진 구멍을 교차시켜 멀리 있는 적이나 가까이에 침투한 적을 쏠 수 있게 했다.

옹성 성가퀴. 평평한 구멍과 경사진 구멍을 교차시켜 멀리 있는 적이나 가까이에 침투한 적을 쏠 수 있게 했다.


  이에 수원시에서는 2000년 각자성석을 제작하여 옹성 안쪽 바닥에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여기에 장안문의 '변천사, 파괴와 복원, 부대시설, 공사 연혁 및 축성재료, 옹성과 오성지, 구조(세부 명칭), 의미와 규모' 등 설명 판을 만들어 놓았다. 장안문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작은 박물관 역할을 한다. 장안문이 자체로도 아름답고 자랑스럽지만, 안내 글을 읽고 보니 더 마음에 닿는다.

  장안문은 화성에서 팔달문과 더불어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그러나 장안문은 팔달문과 달리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장안문의 화려하고 웅장한 자태를 가까이 볼 수 있다.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선조들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수원 화성 4 대문의 바깥쪽 성벽에는 감동, 패장 등 공사 관계자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장안문에는 볼 수 없다. 6·25 전쟁으로 유실된 것으로 추정한다. 수원시에서는 2000년에 각자를 제작하여 옹성 안쪽 바닥에 설치해 놓았다.

수원 화성 4 대문의 바깥쪽 성벽에는 감동, 패장 등 공사 관계자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장안문에는 볼 수 없다. 6·25 전쟁으로 유실된 것으로 추정한다. 수원시에서는 2000년에 각자를 제작하여 옹성 안쪽 바닥에 설치해 놓았다.


  장안문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올려다본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역사의 혼란 속에서도 봄에는 꽃이 피는 것을 여러 해 봤다. 그래서 절망에 무릎 꿇지 않았다. 장안문도 처참한 파괴를 딛고 단호히 일어섰다. 성벽의 이끼는 고통을 이겨낸 우리들의 삶과 닮았다. 문을 나서며 꿈을 꾼다. 시간을 건너온 성장이 미래에도 지속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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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문, 화성, 행궁, 정조, 북문, 옹성,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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