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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없는 시대에 왕이 되어 보다
수원 화령전에서 한나절
2024-07-10 13:58:08최종 업데이트 : 2024-07-10 13:58:04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정전인 운한각 오른쪽에 이안청이 있다. 사이에는 두 건물을 잇는 복도각이 연결되어 있다. 복도를 이용해 옮기니 어진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건물에서 복도각은 수원 화령전이 처음이라고 한다.

정전인 운한각 오른쪽에 이안청이 있다. 사이에는 두 건물을 잇는 복도각이 연결되어 있다. 복도를 이용해 옮기니 어진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건물에서 복도각은 수원 화령전이 처음이라고 한다.


  화성행궁에 우화관과 별주 복원 사업이 완료됐다. 1989년 시작된 복원 사업으로 35년이나 걸렸다. 덕분에 수원 화령전도 새로워졌다. 신풍학교가 이전하고 우화관이 복원되면서 수원 화령전 앞이 탁 트였다. 

  수원 화령전은 화성행궁 옆에 한 몸처럼 붙어 있다. 그러다 보니 행궁의 일부 전각처럼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행궁을 지나 화령전을 제대로 보기 위해 들어간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처마는 채색도 없는데, 어떻게 저런 정갈함을 품고 있을까. 오랜 시간 버텨온 문을 밀고 들어선다. 

  화성행궁은 정조의 꿈이 담긴 곳이다. 현륭원을 방문할 때마다 여기 머물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치렀다. 정조는 상왕으로 물러나 화성행궁에 기거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 꿈은 자식인 순조가 행궁 옆에 수원 화령전을 건립하면서 이뤄졌다. 화성행궁은 정조의 효심을 화령전은 순조의 효심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외삼문에서 들어서면 내삼문이다. 일직선으로 정전인 운한각이 보인다.

외삼문에서 들어서면 내삼문이다. 일직선으로 정전인 운한각이 보인다.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하는 바람에 수원은 중앙 정치 무대에서 멀어져 갈 뻔했다. 조선 최고의 특수부대 장용영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다행히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 건립으로 수원은 여전히 국정 중심에 있게 됐다. 

  순조는 15살이 된 해에 처음으로 부친 정조의 무덤에 절을 올리고 화령전을 찾았다. 제의 중에 9차례 화령전을 찾았다. 헌종이 두 차례, 철종이 세 차례, 고종은 두 차례 작헌례를 올렸다(《합리적인 의례 공간 <수원 화령전>》, 17쪽 김동욱 경기대 명예교수, '화령전의 건축 특징과 문화재적 가치' 참고)

판위. 왕이 목욕재계 후 의관을 정제하고 제례 할 때 잠시 여기서 대기한다.

판위. 왕이 목욕재계 후 의관을 정제하고 제례 할 때 잠시 여기서 대기한다.


  국왕이 직접 참여하는 제례는 왕실 세자나 의정부 영상, 판서 등의 대신들이 따른다. 왕의 행차도 특별한 일이지만, 국왕이 직접 절을 올리는 일도 흔하게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수원은 지방 도시임에도 매년 국왕을 비롯한 대신들이 행차했다. 모두 화령전 때문이었다. 

  화령전의 정문인 외삼문은 동향이다. 화성행궁이 팔달산에 등을 기대고 있듯 뒤쪽은 팔달산 자락이다. 그러다 보니 신풍루와 같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침묵하고 있는 문을 보면 낡은 듯하지만, 허름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온화함과 부드러움이 번진다. 

정조 어진. 융복을 입은 정조의 어진이 위엄있지만, 인자함도 있다.

정조 어진. 융복을 입은 정조의 어진이 위엄있지만, 인자함도 있다.


  외삼문 양쪽에 작은 행각이 있고, 가운데 신도가 있다. 내삼문에서 정전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된다. 정전은 지붕이 높지 않고, 기둥도 크지 않다. 웅장함도 없고, 제례 공간답게 검소하다. 하지만 낮은 단에 올라 있는 정전은 위엄을 잃지 않고 있다.  

화령전의 정문인 외삼문은 동향이다. 침묵하고 있는 문을 보면 낡은 듯하지만, 허름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온화함과 부드러움이 번진다.

화령전의 정문인 외삼문은 동향이다. 침묵하고 있는 문을 보면 낡은 듯하지만, 허름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온화함과 부드러움이 번진다.


  정전인 운한각 오른쪽에 이안청이 있다. 정전을 수리하는 등 무슨 일이 있을 때 어진을 잠시 옮겨 모시기 위한 공간이다. 그 사이에는 두 건물을 잇는 복도각이 연결되어 있다. 복도를 이용해 옮기니 어진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설명 글에 의하면 우리나라 건물에서 복도각은 화령전이 처음이라고 한다. 비록 어진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임금처럼 정성과 격식을 갖춰 받든 문화가 엿보인다. 

  화령전 전체가 조용하다. 푸른 하늘 아래 잘 어울려 마음마저 차분해진다. 번잡한 공간이 아니라, 걸음이 공간에 친숙하게 적응한다. 자연스레 걸음걸이가 느려진다. 느릿하게 걷다가 나무 그늘에 앉았다. 조용하면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 신기한 현상이 인다. 혼자 제향에 주인이 돼 본다. 왕이 목욕재계 후 의관을 정제하고 제례를 위해 판위에 섰던 것을 따라 해본다. 엄숙한 순간에 온몸을 지탱할 수 있는 자리다. 

화령전 외벽도 새로 단장을 했다. 주변 공간이 더 넓어 보인다.

화령전 외벽도 새로 단장을 했다. 주변 공간이 더 넓어 보인다.


  왕처럼 근엄하게 정전에 오른다. 융복을 입은 정조의 어진이 위엄있지만, 인자함도 있다. 어진의 눈빛을 한참 보고 있으니 귓가에 소리가 들린다. '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화락하게 하겠다는 꿈[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이 들린다. 다양한 계층과 인재를 고루 등용해 조선 사회의 통합을 이루고자 했던 개혁 정신도 생생하다.

  화령전은 말없이 평온하다.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공간에 하늘이 맑다. 처마 밑 서까래는 서로를 보듬으며 늙어왔다. 세상은 이기적인 논리로 가득하다. 온통 정신이 사납다. 왕이 사라진 시대에 왕이 되어 보니, 화령전에 담긴 의미와 대화할 수 있다. 마음도 비우고 욕심도 내려놓는다. 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휴식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어정. 화령전 제사에서 사용하는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이다. 뒤는 팔달산 자락. 화령전은 화성행궁처럼 팔달산에 기대고 있다.

어정. 화령전 제사에서 사용하는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이다. 뒤는 팔달산 자락. 화령전은 화성행궁처럼 팔달산에 기대고 있다.


  화령전의 국가유산 지정 명칭은 수원 화령전이다. 1963년에 사적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핍박을 이겨내고, 6.25사변에도 원형이 크게 손실되지 않았다.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역사적 보존 가치가 높다. 이런 이유로 국가유산청은 수원 화령전의 운한각, 이안청, 복도각 세 건물을 보물 제2035호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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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령전, 화성행궁, 정조, 외삼문, 운한각, 국가유산,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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