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물결치는 추억과 마주하다
수원박물관 ‘1960년대 만나기’ 전시관
2024-09-06 11:21:56최종 업데이트 : 2024-09-06 11:21:35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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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중앙극장. 남문은 80년대까지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중앙극장 앞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수원박물관에 '1960년대 만나기' 전시관이 있다. 보통 박물관은 아주 오래전 유물만 있는데, 여기서는 1960년대 남문과 영동시장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겪었던 시간이 실감 나게 재현돼 있다. 남문 중앙극장 시장 풍경은 중년 세대에게도 익숙하다. 소개 글에 의하면 '6.25 전쟁 직후인 1953년 9월 10일 남문 옆에서 개관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80년대까지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그중에 중앙극장 앞은 사람들이 붐볐다. 여기서 친구들을 만났다. 남문에 시장을 가거나 옷을 사러 갈 때도 중앙극장 앞에서 서성거렸다.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들어오면서 2004년 문을 닫았다. 전시관에는 1960년대 만들어진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영상을 통해 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쁘다 양장점은 1960년대 초반 영동시장 안에 세워진 양장점이다. 양장점은 유행을 따르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예쁘다 양장점은 1960년대 초반 영동시장 안에 세워진 양장점이다. 당시에 정장 등은 맞춰 입었다. 따라서 양장점은 유행을 따르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당시만 해도 양장점 상호가 순우리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천덕상회는 1955년 9월 영동시장 안에 식품점으로 개업하였고, 1957년 천덕상회 간판을 걸었다. 분유 전문 대리점으로 성장하였고, 이후 다양한 양품을 취급했다. 주인은 윤한흠 씨로 1969년 폐업했다. 공설 목욕탕과 이발관도 눈에 띈다. 당시에는 가옥 구조가 목욕을 수시로 할 수 없었다. 목욕탕이 인기였다. 특히 명절이나 입학식 등 특별한 날에만 갔던 기억이 있다. 이발소에 가면 무조건 바리깡이라는 기계로 머리를 깎았다. 기계가 성능이 좋지 않아 머리카락이 뽑히는 일이 흔했다. 공설 목욕탕과 이발관은 1970년대 초에 없어졌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머니도 장사하고 있다. 화춘옥은 수원 양념갈비 원조다. 1940년대부터 1979년까지 영동시장에 있었다. 전국적 명성으로 박정희 대통령도 찾았다고 한다. 양념갈비는 이후 수원 갈비의 대명사가 되었고, 수원을 갈비의 고장으로 자리 잡게 했다. 다방이 있는데, 여기서는 대한뉴스에 소개된 수원 모습과 수원과 관련 있는 민요, 동요, 가요를 만날 수 있다. 시장 모형 벽면에는 당시 표어도 있는데,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문구도 보인다. 공설 목욕탕과 이발관. 당시 목욕탕은 명절 등 특별한 날에만 갔다. 뒤에 수원 양념갈비의 원조 화춘옥이 보인다. 사진관에서는 다양한 옷을 입고 옛 수원 화성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옛 사진을 영상 화면으로 보여주는데, 연무대에 소풍 가서 단체로 찍은 모습과 허물어진 봉돈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있다. 1967년 팔달산에서 바라본 축만제 사진이 있다. 축만제 저수지 오른쪽의 작은 산이 여기산이고 왼편으로는 반듯하게 정비된 서둔이 자리 잡고 있다. 뒤로는 칠보산이 뻗어 있다. 초가집만 몇 채 보일 뿐 일대가 온통 논밭이다. 지금과 비교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사진관은 옛 수원 화성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체험 공간이다. 옛 사진을 영상 화면으로 보여주는데, 연무대에 소풍 가서 단체로 찍은 모습과 허물어진 봉돈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있다. 서쪽 성벽과 화서문 일대를 찍은 사진도 1967년 모습이다. 팔달산 서장대에서 북쪽으로 성벽을 따라 내려가며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이 있는데,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성곽도 온전하지 않다. 성안에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농경지의 끝으로 만석거가 보인다. 거리 풍경. 시장 모형 벽면에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보인다. 1960년대는 수원에 큰 변화가 있었다. 경기도청이 1967년 서울 세종로에서 이전해 왔다. 당시 수원 공설운동장이 있었던 팔달산 자락에 들어오면서 수원 공설운동장은 북문 밖에 조원동으로 이전했다. 도청이 수원으로 오면서 관련 공공기관과 단체들도 수원으로 이전하였다. 농협 경기지부, 적십자 경기지사, 언론 기관 등이 대표적인 예다. 1967년에 연초제조창이 정자동에 착공되었고, 이듬해에는 선경합섬과 삼성전자가 설립되었다. 1967년 팔달산에서 바라본 축만제 일대. 초가집만 몇 채 보일 뿐 일대가 온통 논밭이다. 자연스럽게 서울과 수원 사이 교통량도 증가했다. 1968년 6월에는 경부고속도로 첫 단계로 서울 수원 구간이 개통되었다. 수원이 서울에서 남부지방으로 가는 나들목이 됐다. 공공기관 정착과 산업 시설 정착으로 수원은 대규모 인구 유입과 도시화가 진행됐다. 1970년 화서동에 서문 아파트가 들어섰다. 수원 최초의 아파트다. 논 가에 아파트만 달랑 섰지, 주변은 여전히 농토가 전부였다. 전쟁 이후 수원 시민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초가집에서 살았다. 시장에 점포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영동시장 일대는 천변에 간이 점포와 노점이 많았다. 이러니 수원화성 복원은 꿈도 못 꾸고 있었다. 성곽 주변에는 전쟁 이후 들어선 주택들이 있었고, 조금 남은 성곽은 담장으로 사용했다. 창룡문 문루는 도망가고, 장안문은 부서져 있었다. 성벽 사이는 끊어지고 길이 됐다. 서쪽 성벽과 화서문 일대. 1967년 모습.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이 보이지 않는다. 성곽도 온전하지 않다. 60년대를 지나온 어른들은 옛날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때는 먹을거리가 부족해 늘 배고팠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던 삶은 평생 한이 됐다. 그래도 고단한 삶에도 가족과 함께한 생활을 잊지 못한다. 기억하지 않으면 잊힌다는 말처럼, 그때 가족의 사랑을 잊지 않으려 기억의 우물을 들여다본다. 수원박물관에 '1960년대 만나기' 전시관은 젊은 세대에겐 옛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지만, 중장년층에게는 가슴에 물결치는 추억과 마주하게 한다. 수원박물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대로 265 수원화성, 수원시, 1960년대, 경기도청, 영동시장, 남문, 중앙극장, 수원갈비, 윤재열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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