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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상)
2008-01-03 16:02:17최종 업데이트 : 2008-01-03 16:02:17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정조대왕의 재임기간을 가리켜 '조선시대 르네상스'라고 표현한 글들을 종 종 읽는다. 

필자 개인적으로 대단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서구의 문예부흥기를 뜻하 는 르네상스라는 말을 가져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붙이는 행위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 르네상스라는 말이 정조시대를 깊이 연구해 호감을 가진 이들에 의해 기왕에 사용되었고, 또 그런 대로 정조시대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 아주 나쁘게는 여겨지지 않는다. 

정조대왕! 
그는 역사와 현재에 남긴 것이 아주 많은 임금이다. 
우선 '성곽의 꽃'이라고 불리는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축성했고, 2천권이 넘는 책을 직접 쓰거나 편찬했다. 
중국 한나라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저술을 남긴 제왕은 극소수이며 그 분량도 100여권에서 200권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조대왕이 얼마나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런 정조대왕이 규장각을 만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또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애민군주(愛民君主)로서 화성을 축성할 때 강제 부역 대신 후한 임금을 지급하고 더위에 지친 일꾼들을 위해 몸소 척서단 등 을 직접 처방해 내려주고 복용방법까지 상세하게 일러준 임금이다. 

정조대왕은 긴 가뭄 끝에 비가 내리면 감동할 정도로 기뻐했다.
뜰에다가 측우기를 놓아두고 수시로 비의 양을 물었으며, 곡식이 부족한 탐라(제주) 백성들을 늘 안타깝게 여겨 가뭄이 들면 언제나 다른 지방보다 먼저 배에다 곡식을 싣고 가 먹이도록 했다. 
그 배가 갈 때는 반드시 손수 제문을 지어 바다의 신에게 제사하도록 했다는 것. 

다산 정약용 등을 비롯한 실학자들을 중용했으며,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두 어 비록 임금의 잘못을 전혀 숨김없이 말하고 대드는 자라도 너그럽게 포용 하여 말로 인해 죄를 얻은 자는 한명도 없었다. 
수원으로 능행차를 할 때 백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격쟁(擊錚:백 성들이 임금의 행차시 꽹가리나 징을 친 뒤 임금에게 상소를 하는 제도)을 신하들의 반대에도 강행한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백 천가지 병폐는 다 언로가 막혀있기 때문인데, 구언(求言)의 기회를 마 련해도 입바른 말을 들을 수 없고, 다만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풍조만 일 고 있으니…(중략)…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바로 나 자신의 허물이나 정치의 폐단에 관한 것이니 말을 하도록 하라" 
"까마귀나 솔개의 알을 깨트리면 봉황새가 오지 않는 법이다. 그가 임금의 직무에 관해 말을 했으니 권장할 일이지 죄 줄 일이 아니다."라며 충언을 유도하고 있다. 

때마침 몇년 전 향토사학자이자 답사전문가인 염상균씨가 사단법인 화성연구회·수원청소년문화센터 주최 '화성 바로 알기 역사교실'에서 발표 한 자료가 '정조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주제였다. 
이날 발표된 내용은 참석자들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는데 먼저 정조대왕의 탄 생과 어린 시절 부분을 발췌해 여기에 소개한다. 

'정조임금은 영조28년(1752) 9월22일 축시(01~03)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그에 앞서 영조 27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는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게 된다. 용꿈을 꾼 사도세자는 징조가 예사롭지 않다며 새하얀 비단에다 꿈에 본 용을 그려 벽에 걸었다. 
성자를 낳을 조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조는 태어나면서 큰 울음소리로 아버지의 예감에 답했다. 큰 쇠북소리를 울리는 것 같은 울음소리에 온 궁중이 다 놀랐던 것이다. 

비록 강보에 싸여 있었지만 기상이 의젓하고 콧날이 우뚝했으며, 꿈에서 용 을 보아서인지 얼굴은 용을 닮아 있었다. 
영조도 산모인 혜경궁 홍씨에게 "네가 이런 자식을 낳았으니 종묘사직에 무 슨 걱정이 있겠느냐?"며 아기의 이마와 뒤통수가 자신을 닮았다고 흡족해 했다. 

온나라의 축복 속에 태어난 아기는 백일도 되기 전에 섰고, 일년도 채 못되 어 걷기 시작했으며, 돌 때는 돌상으로 걸어가서 맨 먼저 붓과 먹을 만지고 책을 펴서 읽는 시늉을 했다. 
글씨 쓰기를 좋아해 두 살 때 이미 글자 모양을 만들었고 3~5세 때는 제법 글씨체가 이루어져 날마다 그것으로 장난을 삼았다. 
정조가 대여섯 살 때 쓴 글씨를 가지고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글은 이미 너덧 살 때 다 알아서 어른처럼 편지를 써 내려갔다. 
타고 난 천성이 검소하고 소탈해서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입은 옷이 더러워지고 해져도 싫어하지 않았으며, 장난감도 질박한 것을 좋아해 한번 마음에 들면 오래 가지고 놀았다. 
늘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독서를 시작했으며 너덧 살 때부터 꿇어앉기를 좋아해 항상 바지의 무릎 부분이 먼저 해지곤 했다. <김우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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