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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의 수원
옛날 옛적에도 수원에 사람들이 살았을까요?
2007-06-13 11:52:09최종 업데이트 : 2007-06-13 11:52:09 작성자 :   e수원뉴스

'수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세계문화유산 화성입니다. 이제 화성은 수원시민들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뒤주에 갇혀 억울하게 돌아가신 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지극한 효심으로, 그리고 구태(舊態) 정치를 개혁할 목적으로 축성한 화성...
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뒤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죠.
따라서 많은 이들은 수원의 역사가 200년을 약간 넘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원은 조선시대 이전인 고려시대, 통일신라시대(사실 저는 남북국시대-발해와 신라라는 표현을 더 선호합니다!!) , 삼국시대, 원삼국시대(삼한시대)를 지나 선사(先史)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선사시대란 역사시대 이전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통상 국가 발전 이전의 시기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선사시대에 수원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5천여 년 전 고조선을 세워지기 이전인 석기시대에도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이예요.

이를 증명해주는 것이 고고학적 조사 결과입니다.

 선사시대의 수원_1
팔달산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고인돌.이곳에서는 간돌칼(마제석검)도 출토됐다.


수원에서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많이 발견됐습니다.
구석기 시대는 까마득한 옛날, 대략 4만~50만년전 시대인 것은 다 알고 계시죠?

이 시기의 유물로는 구석기가 있는데 수원시에서는 파장동에서 외날찍개(긁개)와 주먹도끼 등이 발견되어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거주했음을 밝혀주고 있어요.

 선사시대의 수원_2
파장동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 석기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는 그동안 원삼국시대의 제사 유적으로 알려졌던 화서동 꽃뫼 유적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이 시기에도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이 입증됐습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은 여러 곳에서 출토됐습니다.

현재까지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하천이 흘러 농경에 적합한 수원의 서남쪽 권선구 일대에서 발견됐어요.

구운동에서는 반달형 돌칼과 무문토기 조각이 수습되었고, 금곡동에서는 무문토기 조각과 돌보습, 갈돌 등 농경․주거 생활과 관련된 유물이 수습됐지요.
호매실동에서는 지석묘로 추정되는 유적과 무문토기 조각이 발견됐으며 고색동과 당수동에서도 소량의 무문토기 조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동의 팔달산 남쪽 구릉사면에서는 총 4기의 지석묘(고인돌)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마제돌칼(간돌칼) 1개가 출토되기도 했지요. 

아직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지석묘의 일반적인 성격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또 화성시 태안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금산 일대에서도 다량의 무문토기 조각과 주거지 구덩이 등의 유구가 발견됐습니다.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 뿐만 아니라 백제시대까지 지속되고 있어 수원지역의 역사적 변화상을 살펴보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입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면 선사시대의 수원 역사를 복원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수원지역 청동기~철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서둔동의 여기산 유적이 꼽힙니다.
해발 104.8m의 여기산은 1979~1981년에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청동기시대의 집터 4기와 철기시대의 집터 3기가 조사됐습니다. 

청동기시대의 집터는 중부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긴 사각형으로 파여 있는 수혈 집터로서 집터 안에서 무문토기 중기에 해당하는 공열문토기와 가락동식 토기, 석기로는 석촉과 숫돌 등이 출토됐지요.
이 청동기 주거지 유적은 출토토기로 보아 한강 하류지역의 청동기 문화권과 성격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초기 철기시대의 집터는 한 변이 4m 전후의 방형과 장방형의 수혈집터로, 바닥면의 중앙에는 모두 용마루를 받치는 기둥구멍이 있고 벽체 쪽에는 서까래를 세운 기둥 구멍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7호 집터에서는 난방시설인 화덕이 발견돼 주목됩니다.
또 같은 철기시대 집터인 4호 주거지에서는 불에 타 숯으로 남은 지붕 서까래와 그 사이사이에 갈대로 보이는 숯이 깔려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집의 형태를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수 있지요.

철기시대의 집터 안에서는 완형(盌形:주발모양)과 발형(鉢形:스님들의 식기인 바리때 모양)의 무문토기, 수형 흑색토기, 타날문(打捺文:두드리듯이 무늬를 찍어 넣음)토기, 시루 등이 나왔고 철도끼, 철촉, 철칼, 철톱 등이 출토됐습니다.
한편 최근의 지표 조사에서도 여기산 북서 사면 일대에서 주거지가 조사됐는데 중도식 무문토기와 갈판, 다량의 무문토기 조각과 타날문토기 조각이 수습됐습니다.

특히 집터 주변에서 수습된 토기의 밑바닥에서 볍씨 자국이 발견되고 있고, 또 7호 주거지의 난방시설에서 진흙에 볏집을 넣어 구은 흔적이 뚜렷한 것을 보면, 이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겠지요. 

또 철기시대에 들어서 볏집을 이용한 흔적을 보면 수확도구로서 낫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발굴성과로 미루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걸쳐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거주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원삼국시대(아까 삼한시대라고 얘기했지요?) 이후에는 모수, 석색, 매홀 등 우리 수원의 지명이 각종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선사시대에 수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어요.
그러나 수원지역은 넓은 평야와 그 가운데를 흐르는 황구지천과 서호천, 수원천, 원천천 등의 하천, 높지 않은 산과 언덕 등 사람들이 농경을 하면서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수원의 남․서쪽은 더욱 주거와 농경에 적합한 환경을 지녔습니다.
따라서 수원에는 선사시대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군락을 이루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삼국시대에 이르러 수원과 수원인근에 모수국, 석색국, 상외국과 같은 부족국가들이 성립된 것을 보면 그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삶의 뿌리를 이곳에 내린 채 대를 이어오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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