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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품, 아버지 같은 산...” 광교산
<수원의 산하 -1 >수원의 주산이자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쉼터
2007-06-28 17:45:34최종 업데이트 : 2007-06-28 17:45:34 작성자 :   e수원뉴스

수원의 산, 광교산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다..

돼지가 나타난다는 기사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만큼 산림이 울창해지고 동·식물들이 살아갈 환경의 보존이 잘 되고 있다는 것이어서 은근히 흐뭇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요.  

인구 110만의 대도시 수원을 감싸고 있는 산, 광교산은 예로부터 수원의 진산(鎭山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이었습니다.

이 산은 수원시의 북쪽에서 두 팔을 벌려 시 전체를 끌어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품에 드는 순간부터 아늑한 느낌을 갖게 되지요.

높이는 582m로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많은 골짜기와 단조롭지 않은 등산로, 그리고 울창한 숲과 바위, 호수 등 다양한 풍경을 계절별로 선사하고 있어 항상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겨울철 눈에 덮인 풍경이 '수원팔경' 중의 하나인 '광교적설(光敎積雪)'로 불릴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맑은 날 평택항, 북한산까지 손에 잡힐 듯 조망...산 아래 하천 호수 거느려 
 
광교산의 자락은 동으로는 성남시를 지나 과천의 청계산에 이어지고 있으며, 북으로는 백운산을 거쳐 광주의 고분현에 닿습니다.

동남쪽으로는 용인시 수지에, 서쪽으로는 의왕시까지 퍼져있고요.

광교산의 제일 높은 산봉우리(주봉)는 시루봉과 형제봉, 비류봉 등인데, 일기가 청명한 날 이곳에 오르면 동쪽으로 멀리 여주, 이천, 용인까지 , 서쪽으로는 인천항과 평택항까지 북쪽으로는 북한산까지 조망할 수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입니다.

또 광교산 아랫부분에는 광교저수지와 소류지, 파장저수지, 사방댐 등이 조성되어 있어 광교산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넉넉한 품, 아버지 같은 산...
광교산 사방댐의 한폭의 그림같은 모습


광교산 남쪽에서 비롯되는 물줄기는 광교천으로 모이고 광교저수지에서 잠시 머문 다음 다시 수원천을 이루어 수원시내를 관통, 황구지천으로 합쳐져 서해로 들어갑니다.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풍덕천, 동막천을 이루고 숯내(탄천)에 합류하면서 남한강으로 흘러들지요.

서쪽은 미륵골과 일림으로 흘러 만석거와 서호에 머물다 서호천, 장지천을 지나 오목천, 황구지천 물과 합수해 서해로 들어가고요.

남서쪽 계곡에서 비롯된 물줄기는 이의동 산의실을 지나 원천저수지를 이뤘다가 원천천을 이뤘다가 황구지천과 만납니다. 

북쪽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고천으로 해서 맑은내로 흘러가다가 안양천을 이룹니다.

따라서 광교산은 인근 대부분 하천의 발원지가 되는 셈이지요.

광교산의 옛 이름은 광악산(光嶽山)입니다. 

 '악산(嶽山)'이란 예로부터 큰 산, 특히 바위가 솟은 산을 지칭 합니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광교산을 큰 산으로 여기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사실 광교산은 해발 582m로서 그리 높은 편이 아니예요. 그럼에도 '악'으로 불리운 것은 산의 면적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형제봉이나 시루봉 등이 돌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넉넉한 품, 아버지 같은 산...
맑은 산 광교산에 오르면 북한산도 보인다


                  정상에 올라가면 서해바다도 가깝게 보인다

고려 태조 왕건, 광교산으로 개칭...89개의 사찰 있었던 영험한 산

이 산이 현재의 '광교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머무르면서부터입니다.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과의 전투에서 회군하는 길에 이곳 광악산 행궁에서 군사들을 위로할 때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불교신자였던 왕건은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여겨 그때부터 광교산(光敎山)이라고 부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광교산에는 창성사, 미약절터 등 많은 절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조선말기에 발간된 '수원군·읍지'라는 책에는 고려시대에 8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89개의 암자라고는 하지만 창성사지나, 미약절터 그리고 몇 군데의 절터 흔적을 봐서는 작은 암자의 규모를 넘어서는 사찰이 여럿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도 산을 오르다보면 곳곳에 절터로 추정되는 터가 많이 남아 있고 이곳에서는 예외 없이 기와며, 토기, 자기 조각이 널려져 있고, 또 석축 기단과 절집 기둥을 받쳤던 주춧돌, 우물터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영험이 있어서 인지 산불과 오염을 우려한 당국의 단속에도 많은 무속인과 주민들의 기복행위가 산속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 건강하게 해달라고,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행위에 대해서야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이로 인해 산불이 일어난다든가, 산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맑은 물이 오염된다든가 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산신이 노할 것 같지요?


 수많은 전설과 고적이 있는 산...고려시대 불교 성지로 각광

 광교산에는 많은 고적이 남아 있으며 전설과, 사화(史話)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수원군·읍지' 등의 고서에는 89암자의 존재 사실을 비롯해 고려궁터(행궁), 고려시대의 아랫 창고(下倉), 종루(鐘樓), 문바위(門巖), 망천(忘川), 우평(禹坪), 백제 행전(百濟 行殿), 정자산 옛 우물(亭子山 古井), 김준용 장군 전승지 등이 기록돼 있지요.

 이 가운데 고려궁터는 '고려사촬요(高麗史撮要)'에도 나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유금필을 파견해 후백제의 견훤을 치라고 했는데 병력이 적어 전진을 못하자, 왕건이 직접 전투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여산이라는 곳에 진을 쳤을 때 유금필의 첩보 편지가 도착해 회군하는 길에 광교산에 행궁을 짓고 군사들을 위로하며 먹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고려하창은 광교산 아래의 창고라는 뜻인데 불교가 융성한 고려시대 광교산에 절이 많이 들어서고 승려들 또한 늘어나자 이들의 식량을 대주기 위해 건립한 창고입니다. 

하광교동 윗말 못 미쳐 왼쪽으로 약간 들어간 지역을 '하챙이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챙이라는 지명이 '하창'에서 유래한 듯 하고 특히 주민들도 이곳이 옛날 광교산에 있던 89암자의 식량을 대어주던 보급창고가 있었던 곳이라고 말하고 있어 거의 확실한 듯싶습니다.

특히 주민들이 안하챙이(하광교쪽), 밖하챙이(상광교쪽)라고 나눠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창고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고 최소한 2채로 구성돼 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지금 밖하챙이 터는 밭으로, 안하챙이 터는 논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따라서 당시 광교산은 불교의 성지였음을 알 수 있고, 또 그 아래 형성된 사하촌(寺下村) 역시 만만한 규모가 아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신라 최치원과 백제 온조 사위... 김준용 장군 승전 이야기 전해져 
 
'지리비결'이라는 책에는 신라시대의 학자 고운 최치원이 이곳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에 세 곳의 문바위가 있다고 기록돼 있는데 광교산의 문바위가 그 중의 하나로서 최치원은 세 곳을 모두 돌아 본 뒤 광교산의 문바위를 가장 사랑해 여기에 암자를 지었다고 합니다.

또 우물 밑에 구리 주머니를 묻었다고 하는 기록이 '수원군·읍지'에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자도, 구리주머니를 묻은 우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문암이 있는 문암골은 광교산 중에서 가장 많은 무속인과 주민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리는 곳으로서 영험이 서린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광교산 아래엔 우평, 또는 우성위평(우성위뜰)이라는 곳과 우성위보라는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백제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뒤 사위 우성위와 딸을 보내어 이곳에 살게 했답니다.

우성위는 농토를 가꾸기 위해 광교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막아 보를 만들고 수로를 팠다고 전해지지요.

'수원군·읍지'에는 우성위가 살던 집터가 갓모봉 아래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백제 행전은 딸과 사위를 못잊어 하는 온조왕이 이곳에 가끔 행차를 했기 때문에 건립된 건물이고, 정자산 옛우물은 온조왕이 이용한 우물이어서 어정(御井)이라고도 합니다. 

우성위가 살던 집터에는 창고도 있었다고 하며, 행궁 앞 기슭은 환자(宦者)모퉁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흔적조차 찾을 수없습니다. 

그러고보면 수원이라는 도시는 참 대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요?

왜냐하면 삼국시대의 백제행전, 고려시대의 고려행궁, 그리고 조선시대의 화성행궁 등 3개의 행궁이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시대별로 행궁이 있었다는 것은 수원지역이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밖에 광교산에는 병자호란 때 대승을 거둔 김준용 장군의 전승지인 광교암과 전승 사실을 기록해 놓은 전승비문이 있습니다.   

김준용 장군은 선조 41년(1609) 무과에 급제, 여러 고을 관직을 역임한 뒤 전라병마절도사로 재임 중인 인조14년(1639) 병자호란을 겪게 됩니다.

청태종이 10만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자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원하고자 자신의 군사와 호남지방에서 모집한 근왕병을 이끌고 광교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다른 근왕병들은 모두 패퇴를 거듭하던 상황이었는데 그의 군대만 광교산에서 청나라의 유격 기병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첫 전투에서 패한 청나라군대는 수만명의 병사를 동원해 김준용 장군이 포진한 광교산을 총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의 병력 일부가 광교산 뒷산을 몰래 넘어와 배후의 산봉우리를 차지하고 화살을 비오듯 쏟아 붓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김준용 장군은 용감한 병사 수백명을 뽑아 산을 회복하라고 독려하니 병사들은 즉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지요.

그때 산 봉우리에 적의 장수하나가 나타나 깃발을 휘두르며 공격을 독려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전투의 승리가 어려울 것이다"라고 판단한 김준용 장군은 적장을 향해 집중적으로 포를 쏘아댔습니다.

그런데 옛날 전투에 웬 포가 등장하냐구요? 임진왜란 때 적의 조총에 크게 당한 경험이 있는 조선은 화약을 사용하는 병기 개발에 착수, 병자호란 때는 포와 총의 사용이 보편화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수원시에서 매년 개최하는 정조대왕 능행차 때도 총을 멘 옛날 군사들을 보신 적이 있지요?

아무튼 조선군의 집중 포화에 적의 장수를 비롯 많은 적병들이 쓰러졌습니다.

적장이 죽자 청병들은 큰 울음소리를 내며 시체를 메고 철수했는데, 이 적장이 바로 청태종의 사위 양고리였던 것입니다.

양고리라는 장수는 청군 지휘관 가운데 가장 큰 전공을 세운 자였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는 양고리 외에도 두사람의 청나라 장군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적의 시체가 곳곳에 쌓여 흘러내리는 피가 내를 이루고, 자기 동료들의 시체를 모아 태우는 연기와 처절한 곡성은 광교산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고 하나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골짜기는 그 뒤에 오랑캐들이 항복했다는 뜻을 담아 호항골(胡降谷)로 불리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화성 축성 공사가 시작됐을 때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성역총리대신 채제공이 호항골의 광교암에 친필로 '충양공 김준용장군 전승지' 라고 쓰고 이 글의 좌우에 '병자년 청나라의 난 때 공이 근왕병을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청나라의 대장 셋을 죽였다'라고 새겼습니다.

김준용 장군 전승지는 경기도기념물 38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광교산 형제봉 쪽에서 비류봉 오르는 길 왼쪽에 진입로 안내표시가 있지요.


 창성사 등 절터 곳곳에...식물, 곤충, 동물들의 서식처
 
광교산은 깊고 넉넉한 산세 때문에 많은 동물과 곤충들이 살고 있고,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개암나무, 개옻나무, 복분자 딸기, 이삭여뀌, 미꾸리낚시, 덩굴닭의 장풀, 덩굴별꽃, 달뿌리풀, 남산제비꽃, 고깔제비꽃, 비비추,, 어수리, 큰꿩의 다리, 큰애기아리, 현삼, 흰진범, 고로쇠, 만주고로쇠, 졸참, 갈참, 견갈, 노루귀, 둥근잎 천남성, 히어리나무, 말채나무, 매화말발도리, 주엽나무 등 633종(105과 337속)의 식물이 조사된바 있었지요.

넉넉한 품, 아버지 같은 산...
금낭화의 아름다운 자태

조류는 총 25종 74개체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광교산에서 관찰된 종으로는 소쩍새, 검은 등 뻐꾸기, 되지빠귀, 곤줄박이, 산솔새, 붉은머리 오목눈이, 숲새, 벙어리뻐꾸기 등입니다.

이 가운데 소쩍새는 천연기념물이고 검은 등 뻐꾸기와 되지빠귀는 희귀조류로 알려져 있어요. 또 최근에는 딱따구리를 봤다는 시민들도 많습니다.

야생포유류는 흰넓적다리붉은쥐와 다람쥐, 등줄쥐, 청설모, 산토끼, 오소리, 고슴토치, 너구리 등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약 한달 반 전에 텔레비전 환경프로그램에서 방영된 대로 야생멧돼지가 살고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따라서 광교산은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는 자연학습장일 뿐 만 아니라 수원시민들에게 신선한 산소와 맑은 기운, 건강을 공급하는 중요한 곳으로서 일년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또 수원시내 곳곳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등산로와 산림욕장이 마련돼 있어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다양한 광교산 등산로

이 가운데 수원시민들이 가장 잘 애용하는 등산로 몇 곳을 소개해 볼까요?  

 ▶경기대-형제봉-토끼재-비류봉-시루봉-억새밭-절터약수터-사방댐-버스종점 코스는 보통 3시간이면 걸을 수 있습니다.

산행을 더하고 싶으면 억새밭에서 내려오지 말고 가던 방향으로 직진해 통신대-헬기장-금당약수터-청련사에 이르는 '광교산 종주코스'를 선택할 수 있는데 약 5시간 이상 소요됩니다.
 이 코스를 역으로 가도 괜찮지만 계속되는 오르막 때문에 다소 벅차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광교산 버스종점-사방댐-절터 약수터-억새밭-시루봉-비류봉-토끼재에서 하산-다시 버스종점 코스도 초보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코스입니다.

약 1시간30분 정도면 제자리로 돌아와 시내버스를 타고 내려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보자의 경우 이 코스를 거꾸로 돌 생각은 하지 마시길...토끼재까지 오르는 급경사 나무계단길이 심장을 폭발시킬 지도 모릅니다.

자, 이 코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은 토끼재에서 계속 앞으로... 토끼재-형제봉-백년수 약수터 정상-경기대까지 가세요. 이것이 '광교산 하프코스'입니다.

중간에 문암골로 내려올 수도 있지요.

넉넉한 품, 아버지 같은 산...
토끼재 나무계단


산책만 하실분들은 광교저수지 주변에 개설된 수변도로를 따라 한바퀴 도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산과 물이 만나는 산책로라서 주변 경치도 좋습니다. 

 이 코스가 일반적인 광교산 등산로입니다.
 이 줄기를 타고 산행을 하시다가 형편이 되는 곳에서 하산하면 되지요.

다만 휴식년제로 인해 등산로가 폐쇄된 곳이 있는데  사방댐-노루목 코스가 그렇습니다.


 "대중교통 이용 부탁... 멧돼지도 조심하세요!"

 참, 요즘 광교산에 멧돼지들이 출몰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등산로 외 통제된 곳은 다니지 마시고 야간 산행도 안 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만약에 멧돼지를 만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서 있는 게 좋다 네요. 만약 우산 같은 게 있으면 펴서 들고 있으라고 하는데 멧돼지들이 우산을 바위로 착각해 공격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광교 산행 시 주의할 점 하나 더!

 광교산 입구는 좁아서 저마다 승용차를 가지고 갈 경우 극심한 교통 혼잡 상황이 벌어집니다.
 따라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본인은 물론 남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13번 시내버스가 수시로 광교산 버스종점-경기대-장안문-팔달문-수원역-칠보 구간을 운행하고 있으며, 경기대까지 가는 시내버스가 여러 노선에서 운행되므로 대중교통 이용의 불편은 크지 않을 듯 합니다.

쉼터, 수원의 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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