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섬 방직공장 여공시절, 한일여실 1회 졸업생 이기용 씨를 만나다
섬유산업의 전체 수출액의 30% 이상을 차지하던 1970년대
2023-09-18 15:45:09최종 업데이트 : 2023-09-18 15:45:06 작성자 : 시민기자 곽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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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2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이기용 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일합섬 여공 시절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고 주경야독으로 힘든 서로를 위로하였던 푸른 팔도잔디 속 소녀들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갔던 한일여고생들의 위대한 도전과 성취의 장이자 화합의 상징이다.
한일여실 1회 졸업생 이기용씨가 졸업앨범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식구를 건사하기도 어려운 시절, 영화초등학교, 매향중학교를 졸업하고 돈도 벌고 고등학교도 다닐 수 있다는 희망에 마산 한일합섬 여공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는 1975년 중학교 졸업 후 마산 양덕동에 있었던 한일합섬 부설 산업체 고등학교인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이하 한일여실)를 다녔다. 하지만 고향에서 멀리 나와 지낸 타 지역 기숙사 생활은 쉽지 않았고, 결국 한 달간의 마산 여공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수원 조원동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 후 수원 한일합섬 방직공장에 취직해서 5년 여공생활을 하다가 1979년 22살 즈음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이하 한일여실)에 입학하게 된다. 한일합섬 방직공장 여공시절, 한일여실 1회 졸업생 이기용씨
졸업앨범
"주경야독 고달프지 않았어요. 늘 감사했어요."라고 말하는 이기용 씨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이하 한일여실)의 공부하는 사진과 졸업사진을 보여준다. 한 반에 60명이었던 그 공간을 그리워 하며 그는 "그때는 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성실히 일하고 공부를 한 덕분에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자랑하고 싶은 점은 여공 생활로 받은 월급을 조금씩 저축 했는데 선생님이 그 모습을 좋게 보셨는지 추천을 받아 저축상을 받게 되었어요."라며 "포상휴가로 2박 3일 전주, 경주여행을 다녀왔는데 최고의 호텔에서 묵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곳에서 먹었던 전주비빔밤이 정말 맛있었죠."라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여공들은 한일합섬에 취업해서 돈을 벌어 대부분을 고향의 부모님께 보내드리고, 자신들의 공부도 하려했던 갸륵한 마음씨를 가진 나이 어린 여공들이었다. 이제 그녀들은 나이 60대를 넘나드는 중년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선진화된 대한민국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