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한일합섬 방직공장 여공시절, 한일여실 1회 졸업생 이기용 씨를 만나다
섬유산업의 전체 수출액의 30% 이상을 차지하던 1970년대
2023-09-18 15:45:09최종 업데이트 : 2023-09-18 15:45:06 작성자 : 시민기자   곽노마

조원2동 주민센터에서 이기용씨 인터뷰를 진행했다

조원2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이기용 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수원시 조원동에는 경기도에서 단일 단지로 두 번째 크다는 한일타운 아파트가 있다. 한일타운 아파트 부지에는 1975년 설립된 한일합섬 공장이 있었고 1996년도에는 현재의 아파트 대단지가 조성되었다.

당시 찢어지게 가난했던 삶이여도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다는 희망과 본인을 희생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는 일념으로 산업화 과정에서 여공으로서 살아야 했던 여공들의 이야기가 있다.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이하 한일여실) 제1회 졸업생이자 한일합섬 여공시절을 보낸 이기용 씨를 조원2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한일합섬 여공 시절

한일합섬 여공 시절 


한일합섬은 중학교를 마치고 돈 벌러 온 여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를 세웠다. 본사인 마산을 비롯해 김해, 대구, 수원에도 실업여고를 세워 산업 역군을 길러냈던 한일합섬. 학생들의 출신지는 제주를 포함한 전국이었다.

그 당시 전국 팔도에서 모인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소녀들은 각자 고향에서 한 줌씩 가져온 잔디를 운동장에 깔았다. 이때 조성된 잔디는 '팔도잔디'라고 불렸다. 가난과 남녀 차별로 학업을 포기할 뻔했던 소녀들에게 한일합섬과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는 제2의 고향이자 새로운 기회의 터전이었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고 주경야독으로 힘든 서로를 위로하였던 푸른 팔도잔디 속 소녀들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갔던 한일여고생들의 위대한 도전과 성취의 장이자 화합의 상징이다.


한일여실 1회 졸업생 이기용씨가 졸업앨범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일여실 1회 졸업생 이기용씨가 졸업앨범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기용 씨는 1959년 경기도 수원 조원동에서 3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대식구를 건사하기도 어려운 시절, 영화초등학교, 매향중학교를 졸업하고 돈도 벌고 고등학교도 다닐 수 있다는 희망에 마산 한일합섬 여공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는 1975년 중학교 졸업 후 마산 양덕동에 있었던 한일합섬 부설 산업체 고등학교인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이하 한일여실)를 다녔다. 하지만 고향에서 멀리 나와 지낸 타 지역 기숙사 생활은 쉽지 않았고, 결국 한 달간의 마산 여공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수원 조원동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 후 수원 한일합섬 방직공장에 취직해서 5년 여공생활을 하다가 1979년 22살 즈음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이하 한일여실)에 입학하게 된다.

 한일합섬 방직공장 여공시절, 한일여실 1회 졸업생 이기용씨

한일합섬 방직공장 여공시절, 한일여실 1회 졸업생 이기용씨


그는 "그때 당시는 어려운 시기였죠. 대전, 광주, 강원도 등 전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수원 조원동의 한일합섬 공장에 많이 모였어요."라며 "저의 집이 공장 근처라서 기숙사 학생들이 많이 놀러왔는데, 공장일만 하고 학교를 안다니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야간근무 시간은 오전 6시~오후 2시, 오후 2시~오후 10시, 오후 10시~오전 6시로 3교대로 근무했어요."라고 말했다. 

이어서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이고 오후 2시~ 6시까지 4시간 수업을 받았고, 오전, 오후로 바뀌게 되니 교실에서 공부하는 친구들도 바뀌었죠. 한일합섬 여공들이 2천 명 이상이였어요. 고등학교에 입한 한 학생은 한 학년에 60명씩 8반이었으니 대략 1,500여 명이었던 것 같아요. 직장 생활을 하며 공부를 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늘 감사했어요. 저는 22살에 고등학교에 입학했기에 3년 내내 반장을 맡으며 임원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한일합섬 월급은 8년 차일 때 대략 5만 원 받았어요.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공부하며 일하는 삶은 쉽지 않았죠."라며 그때 당시 추억을 회상한다.


당시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이하 한일여실)는 가정 형편상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여종업들에게 배움의 길을 터주어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과 기능 지도에 역점을 둔다고 전해졌다. 그래서 아래로 동생들이 줄줄이 있는 어머니에게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이하 한일여실)는 좋은 기회로 여겨졌던 것이다.
 

졸업앨범

졸업앨범


또한 그는 한편으로 한일합섬에서 일하면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공장은 직물을 짜는 것은 아니고 원재료로 실을 만드는 작업을 했는데, 저는 인사과에서 일하면서 만들어진 실을 타래로 만드는 일을 했어요. 아무래도 섬유회사이기에 먼지가 많이 날렸고, 어린마음에 먼지를 다 마시면서 일을 하게 되니 건강 염려가 있었어요." 
 

"주경야독 고달프지 않았어요. 늘 감사했어요."라고 말하는 이기용 씨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이하 한일여실)의 공부하는 사진과 졸업사진을 보여준다. 한 반에 60명이었던 그 공간을 그리워 하며 그는 "그때는 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성실히 일하고 공부를 한 덕분에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자랑하고 싶은 점은 여공 생활로 받은 월급을 조금씩 저축 했는데 선생님이 그 모습을 좋게 보셨는지 추천을 받아 저축상을 받게 되었어요."라며 "포상휴가로 2박 3일 전주, 경주여행을 다녀왔는데 최고의 호텔에서 묵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곳에서 먹었던 전주비빔밤이 정말 맛있었죠."라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여공들은 한일합섬에 취업해서 돈을 벌어 대부분을 고향의 부모님께 보내드리고, 자신들의 공부도 하려했던 갸륵한 마음씨를 가진 나이 어린 여공들이었다. 이제 그녀들은 나이 60대를 넘나드는 중년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선진화된 대한민국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곽노마님의 네임카드

한일합섬, 방직공장, 여공시절, 팔도잔디정신

추천 2
프린트버튼캡쳐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