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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효심 되새기게 된 독성산성
쌀로 말의 목욕을 시켰던 세마지를 찾아서
2014-03-17 18:19:58최종 업데이트 : 2014-03-17 18:19:58 작성자 : 시민기자   심현자

구불구불 비탈진 오르막을 올라 고개 마루에 도착했다. 
산수유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꽃망울을 맺고 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세마대지 독산성이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한양을 공격하기위한 올라오던 왜군을 권율 장군이 독산성에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정조의 효심 되새기게 된 독성산성_1
독산성

독산성 동문 입구에 도착하자 사적 제140호 독산성 및 세마대지 비석이 서 있다. 독산성은 평지에서 돌출하여 사방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남한산성과 용인의 석성산성 등과 함께 도성 방어를 위한 삼각체계를 형성하던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성은 백제가 처음 쌓고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때 까지 계속 이용되었던 것을 추정된다. 

정조의 효심 되새기게 된 독성산성_2
독산성 동문

성문에는 '해달의 문'이라고 적혀 있다. 해달의 문 계단에 올라서자 '보적사'라는 절이 있다. 보적사는 삼국시대 독산성을 축성한 후 전승을 기원하기위해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소실과 중건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곽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탁 트인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성을 쌓은 석축들은 서로를 껴안은 듯 이끼를 머금고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세월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성돌 아래로 아카시아와 잡목들이 잘려나가 있다. 나무의 뿌리가 성곽을 받쳐주는 주춧돌 아래를 파고들어 성이 허물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우거진 잡목을 제거함으로써 시야확보에 도움이 된다. 

정조의 효심 되새기게 된 독성산성_3
보적사

독산성은 수원화성에 비해 웅장하고 화려함은 없지만 태고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서문에서 바라보니 유유히 흐르는 황구지천 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황구지천은 수원 시내를 가로질러 흘러오는 물줄기다.
기자의 고향에도 남강이 흐르고 있다. 남강은 진주성 촉성루를 끼고 흐르는 강이다. 고향의 남강에는 전지미가 생각난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강가에서 친구와 질레를 꺾어 먹던 기억들이 세월을 멈추게 한다. 

독산성은 4개 출입문과 비밀통로 암문으로 이루어져있다. 동문과 북문, 서문은 가파른 언덕위에 성곽이 있어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전투와 비상문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문만이 평지로 연결되어 있어 이곳이 모든 물자를 실어 날랐을 것이다. 

정조의 효심 되새기게 된 독성산성_4
서적 140호 세마대 비

성을 돌아 세마대지에 다다랐다. 세마대는 남문 위 언덕으로 동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평지다. 권율 장군은 야간급습과 측면 공격으로 왜군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성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걸 안 왜군은 급수원을 차단하고 지구전을 펼치며 항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장군은 적들이 보는 앞에서 말 등에 물을 부어 말을 씻기면 왜군을 조롱했다. 항복을 기다리던 왜군들은 성안에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 줄 알고 퇴각했다. 독산성에서 말을 목욕 시키던 물은 물이 아니라 말 등에다 쌀을 부어 물인 것처럼 적을 속인 것이다. 

쌀로 말을 목욕시키던 세마대는 큰 바위가 있다. 바위에 누군가가 페인트로 이름을 적어 놓았다. 이름을 사적지가 있는 바위에 적어면 유명인이 되는 것도 아닐 것인데 보기 흉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니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독산성은 조선왕조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 3대가 다녀간 성으로 정조대왕의 효심이 담긴 곳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환궁하던 중 거센 장마 때문에 독산성에서 하루를 묵고 백성들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남기고 갔다. 
그로부터 30년 뒤 풍수지리의 문제로 성을 없애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지만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오히려 독산성을 보수하도록 명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안 높은 곳에 세마대 정자가 있다. 정자는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군사지휘소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정자 안쪽에는 성의 보수역사가 기록된 '중건 경위서'가 붙어있다. 
세마대 독성산성도 수원화성과 더불어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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