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나혜석이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다
나혜석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1)
2012-02-10 12:43:22최종 업데이트 : 2012-02-10 12:43:22 작성자 :   e수원뉴스

(코스1) 화령전→화성행궁광장→창작마을→ (코스2) 종로교회→팔달문시장→못골시장→나혜석거리

수원이 낳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신여성 나혜석. 그녀는 지금의 팔달구 행궁동 부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화성행궁 옆에 조성된 창작마을에는 수원 예술가들과 주민들이 함께 만든 나혜석 타일 초상화가 있다. 
여성의 인권이 낮던 일제강점기, 빼어난 미모와 재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시대의 몰이해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 간 나혜석. 그 녀가 나고 자란 행궁동 일대를 둘러보며 우리의 노라 나혜석을 느껴 본다.

화령전

1935년 어느 봄날.
화령전 뜨락에 따스한 봄볕이 쏟아진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왁자지껄한 팔달문 시장인데 화령전은 다른 세상에 있는 듯 고즈넉하다.

5월은 작약의 시간이다. 똑 떨어지는 모양새를 하고 피처럼 붉은 꽃이 화령전 화단에 흐드러졌다. 산보 나왔던 수원 사람들은 작약꽃밭에서 발길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작약이 아니었다. 화단 앞에 커다란 이젤을 펴놓은 채 작약을 그리고 있는 3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나혜석이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다 _1
화령전

물감 얼룩이 묻은 앞치마를 두른 채 붓을 놀리는 그녀는 여느 조선 여자와는 달랐다. 화장기 없지만 또렷하고 서글서글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다. 아무렇게나 묶어 내린 머리카락마저 멋스럽게 보인다. 

"환쟁인가 봐."
"무식하게 환쟁이가 뭐냐? 화가!"
"간혹 남자 화가는 봤지만 여자가 그림 그리는 건 처음 보네."
사람들은 그녀 주변에 모여서서 화폭에 그려지는 작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끈 것은 그녀의 강렬한 눈빛이었다.
"저 여자, 이상하게 눈이 번들거리네. 폐병이라도 걸린 것 아냐?"
"그러게. 폐병 걸리면 유난히 눈이 반짝거린다며?"
아닌 게 아니라 여인은 상당히 아파 보였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 밑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뭐야, 저거 나혜석이잖아."
"나혜석이 누군데?"
"조선 최초의 서양화간가 뭔가 하는 여잔데, 남편 놔두고 바람 피워서 이혼 당했다지, 아마."
"어머나, 세상에!"
"뿐인 줄 알아? 바람피운 사내를 고소까지 했다잖아. 그래 돈 몇 푼 받고 떨어졌다지. 그래놓고 뭐랬는줄 알아? '정조는 취미'래. 안 지켜도 된대. 서방이고 마누라고 다 애인을 한 둘씩 거느리고 살아야 된대."
"아이고, 망측해라!"

그랬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인은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었다.
이곳 수원에서 '나 부잣집'으로 통하는 나 씨 집안에서 용인군수 나기정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난 그녀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개화한 아버지 덕분에 수원 삼일여학교에 진학했다. 

일찍이 그림에 재능을 보여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을 하고, 3년간 유럽여행을 했고 조선 최고의 여성서양화가로 인정받으며 명사로서의 인생을 누렸다.

김우영은 일본에서도 최고 명문인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변호사를 하고 있는 청년지식인으로 조선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김우영과 나혜석의 결혼은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 결혼이 유독 더 관심을 끌었던 것은 나혜석이 내건 결혼조건 때문이었다. 사실 김우영이 청혼했을 당시 나혜석은 첫사랑 최승구와 사별한 후 방황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치지 않고 기다리는 김우영의 순정에 그녀도 감동하여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때 나혜석은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나를 죽을 때까지 사랑해 줄 것.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셋째, 전처의 자식, 그리고 시어머니와 별거하게 해 줄 것.'

김우영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다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심지어 나혜석은 신혼여행지로 첫사랑 최승구의 무덤을 택했다. 너그러운 김우영은 그것마저 받아들였다. 이렇게 그녀는 한 여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뛰어난 재녀(才女)였다. 조선미전에 출품만 했다 하면 무조건 입선되었고, 재기발랄한 글 솜씨 때문에 각 신문사와 잡지사로부터 끊임없이 원고 청탁을 받았다. 그녀의 머리 모양, 차림새, 일거수일투족은 조선 사회 전체의 관심거리였다. 

그녀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3년간 유럽 여행을 한 시절이었다. 특히 화가인 그녀로서는 미술의 메카인 파리에 머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부터 그녀의 인생에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 천도교 인사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최린.
그는 당시 조선 천도교를 이끌던 인물로 삼일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지도자였다. 대단한 재력가였던 그는 춘원 이광수, 고하 송진우 같은 쟁쟁한 인사들과 막역한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엘리트 외교관 김우영의 아내이자 조선 최고의 여류명사인 나혜석이 민족지도자 최린과 불륜에 빠졌다는 것은 대단한 이슈가 아닐 수 없었다. 

첫사랑 남자의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가자는 아내의 요구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너그러운 남편이었던 김우영조차 이 사건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이혼고백장'을 발표하여 가부장적인 조선사회를 질타했다. '조선 남성들은 이상하다. 자기는 정절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자에게는 지키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여자의 정조를 빼앗으려 한다'. 정확하고 서늘한 지적이었지만 당시 보수적인 조선사회에서는 엄청난 역풍을 맞을 수 있는 말이었다. 특히 '정조는 취미다'라는 발언은 나혜석의 재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덫이 되었다. 

원고 청탁이며 인터뷰 요청이 끊어졌다. 출품만 했다 하면 상을 받았던 조선미전에서 난생 처음 낙선을 했다. 그림을 그려도 팔리지 않았다. 팔리기는커녕 그녀의 전시회에는 관람객이 거의 오지 않았다. 모두가 기피하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병까지 들어 떠돌고 떠돌다가 찾아온 곳은 고향인 수원. 그녀는 서호 강변의 작은 초막에서 약을 먹으며 재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가끔 심란할 때면 어릴 적 나고 자란 이 동네에 와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이윽고 저녁놀이 화령전 마당을 물들일 무렵, 나혜석은 이젤을 접으며 다시 한 번 작약을 바라보았다. 작약은 유럽에서 결혼부케로 가장 인기 있는 꽃이다. 앙증맞고 아름다운 모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약의 꽃말이 '수줍음'이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새 신부를 상징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작약의 꽃말이 두 개라는 걸 모르지. 하나는 '수줍음'인데, 다른 하나는 '교태'거든. 결국은 '수줍음'이 '교태'라는 거야. 내숭이라는 거지. 난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이야. 나는 죄를 짓지 않았어.'
최린을 사랑했나? 남편 김우영을 진정으로 사랑했나?

사실 나혜석의 마음속에 평생 자리하는 남자는 단 한 사람이었다.
최승구! 일본 유학시절 만난 첫사랑! 유학생 사회에서 필명을 날리던 문학청년 최승구와 미술학도 나혜석은 서로의 예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동반자였다. 

최승구는 당시 일본유학생 사회에서 대표적인 민족주의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당대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존경받던 육당 최남선까지 최승구의 시를 인정했을 정도였다. 그림을 그리지만 늘 글을 동경하던 나혜석 역시 최승구의 시적 감수성을 이어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폐병으로 최승구가 요절하면서 나혜석의 인생도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 이후로는 그 어떤 남자도 진정으로 사랑한 적 없어.'
짙어지는 놀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붉은 작약들이 배웅하고 있었다. 

화령전은 본래 조선 23대 임금 순조가 그 아버지 정조를 위해 지은 전각이다. 평생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한 정조는 죽은 뒤에도 아버지의 묘가 있는 수원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의 아들 순조는 그 뜻을 기려 정조를 사도세자 옆에 묻었다. 또한 화성행궁 근처에 화령전을 짓고 그곳에 정조의 어진을 모셨다. 죽어서라도 그리운 아버지와 함께하라는 뜻이었다.

나혜석은 종종 이곳 화령전에 와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고 보면 화령전은 그리움의 장소다. 죽어서까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해 달리는 정조의 그리움, 첫사랑 최승구를 향한 나혜석의 그리움. 나혜석이 그린 화령전 붉은 작약에서 짙은 그리움이 느껴진다.   

화성행궁 앞 광장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의 랜드마크는 화성행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각을 꼽으라면 봉수당(奉壽堂)이라고 할 수 있다.

나혜석이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다 _2
화성행궁광장

이곳은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른 장소다.
'봉수당(奉壽堂)'의 '봉수(奉壽)'는 '장수를 빈다'는 뜻. 일찍이 남편 사도세자를 비극적으로 여의고 정적들로부터 아들 정조를 보호하느라 노심초사하며 살아 온 어머니 혜경궁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이 담긴 이름이다.
그러나 나혜석이 태어나고 자랄 당시, 이 봉수당 자리에는 병원이 들어섰다.

조선을 강제병합한 일제는 '조선읍성 철거시행령'을 만들었다. 서울의 궁궐들을 훼손하는 데 그치지 않고 300개가 넘는 읍성을 파괴하였는데 그중에는 화성행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는 화성행궁 전체를 파괴하고 행궁 정면 오른쪽에는 수원경찰서를 왼쪽으로는 수원토목관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가운데 자리에 자혜병원을 세웠다. 

사실 이것은 모두 일본을 위한 시설이었다. 자혜병원은 일본인 관리들과 자본가들이 사용했고, 수원경찰서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였다. 수원토목관구는 수원 사람들의 토지를 빼앗는 곳이었다.
나혜석도 어린 시절, 이 앞을 자주 지나다녔을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그녀는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 나기정이 일제치하에서 용인군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 이곳을 지나면서는 그 건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혜석이 서울 진명여고보로 유학을 간 6년 후인 1919년 봄, 어느 날, 곱게 화장을 하고 맵시 있게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수원 권번 소속의 기생들이었다. 난데없는 미인들의 출현에 사람들은 넋이 나갔다.
"야, 아주 꽃밭이네, 꽃밭이야."
"그런데 기생들이 왜 이렇게 떼로 모여들지?"

그러나 일본경찰들은 달랐다. 안 그래도 바로 얼마 전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지고 있어 경계하고 있던 참이었다.
"오이~ 다들 서라. 기생들이 뭣 때문에 이렇게들 몰려다니는 거냐?"
순사들이 총검을 들이대며 겁을 주었다.
그러자 무리 속에서 한 여성이 상큼상큼 걸어 나오며 말했다.
"왜 이러세요? 저희는 자혜병원에 건강 검진 받으러 가는 것뿐이에요."
"넌 누구야?"
"누군 누구겠어요? 기생이지."
"기생 누구냐고."
"내 이름이 궁금해요? 김향화에요. 향기로운 꽃. 호홋, 기생 나이 궁금해 하는 사내는 많지만 기생 이름 알고 싶어 하는 사내는 처음이네."
기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이 시끄럽다. 어서 병원으로 들어갓!"

바로 그때였다.
김향화가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자그마한 태극기였다.
"대한독립만세!"
뒤이어 수많은 기생들이 동시에 태극기를 꺼내들며 달리기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시민들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이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이봐, 뭣들 하는 거야? 기생들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는데 사내들이 무슨 꼴이야?"
"그래. 맞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화성행궁 앞 광장 전체가 만세 인파로 덮이기 시작했다.
일본순사들은 닥치는 대로 총검을 휘둘렀지만 누구 하나 달아나지 않았다.
결국 이날 주동자인 기생 김향화는 체포되어 반년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만세운동은 기름을 부은 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천대받던 기생들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우리가 어찌 그대로 있을 수 있느냐?"
전국 각지에서 유생과 학생들이 들고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이렇게 김향화가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루는 동안 나혜석 역시 서울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이끌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나혜석과 김향화. 서로 만난 적은 없고, 사는 세계도 달랐지만 두 수원 여성의 기백이 독립운동의 작은 씨앗이 되었음은 의심할 수 없다.
흔히 나혜석을 여성화가, 페미니스트, 자유연애론자로만 생각한다. 혹은 아버지와 남편이 일제치하에서 각각 군수와 외교관을 지냈다는 이유로 나혜석 역시 친일파로 묶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고민하는 가슴 뜨거운 애국자였다. 화성행궁 앞 광장에 서면 나혜석과 김향화, 두 수원 여인의 당찬 눈빛과 심장고동이 느껴진다.

창작마을

화성행궁 왼쪽으로 난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색다른 매력을 가진 거리가 나타난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카페, 앤티크한 느낌의 공방...
바로 수원의 예술가들이 모여 작업하는 창작마을이다.

나혜석이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다 _3
행궁동 골목에 그려진 벽화

나혜석이 어린 시절을 보냈을 이곳에는 현재 타일로 만들어진 커다란 나혜석 초상화가 있다. 높이 15m, 너비 8.5m로 3층 높이에 달하는 대형 작품인데 널리 알려진 나혜석의 자화상을 타일로 구현하고 있다.
이 자화상을 구성하고 있는 타일은 자그마치 3000개에 달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3000개의 타일 하나하나에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타일 그림 속 주인공들은 창작마을에 거주하는 31명의 작가와 지역주민, 그리고 화성행궁을 찾은 방문객들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화상으로 나혜석 자화상 만들기'작업의 결과물이다. 창작마을의 예술가들이 지역주민들과 화성행궁 관람객들에게 타일을 한 장씩 나눠 주고 각자의 얼굴을 그리게 한 것이다.
나혜석의 얼굴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타일들은 창작마을에 거주하는 31인 작가들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주변 배경은 지역주민들과 화성행궁 관광객들의 자화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일 하나하나에는 자화상의 주인공에 얽힌 이야기까지 적혀 있다.

이 3000명의 자화상 타일로 만들어진 나혜석의 모습을 보면 그녀가 살다간 곡절 많은 인생사가 느껴진다. 최린과의 불륜으로 이혼을 당하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으며 살던 말년의 나혜석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반추했다.
"나는 18세 때부터 20년간을 두고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즉, 우등 1등 졸업사건, M(첫사랑 최승구)과의 연애 사건, 그와 사별하고 발광 사건, 다시 K(남편 김우영)와 연애 사건, 결혼 사건,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활약 사건, 황옥 사건, 구미 만유(유럽 여행) 사건, 이혼 사건, 이혼 고백장 사건, 고소 사건, 이렇게 별별 것을 다 겪었다. (중략)누구에게든지 호감을 주던 내가 이제는 사람이 무섭고 사람 만나기가 겁이 나고 사람이 싫다. 내가 남을 대할 때 그러하니 그들도 나를 대할 때 그럴 것이다.(중략) 다 운명이다. 우리에게는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 그러나 그 운명은 순순히 응종하면 할수록 점점 증장하여 닥쳐오는 것이다. 강하게 대하면 의외로 힘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나혜석 '신생활에 들면서' 중에서)

당시 나혜석은 특별한 여성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미모와 재능으로 뭇사람의 사랑을 받고,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뜨거운 사랑을 했고, 3년간의 유럽여행을 통해 식견을 넓혔으며, 명사로서 화려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다 최린과의 사련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늘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처음에는 동경과 약간의 질투가 어려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경멸과 증오로 변해 갔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었던 그녀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외톨이로 인생을 마쳤다.

그러나 오늘날 그녀는 다시 이렇게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로 이루어진 타일 속에서 그녀가 조용히 웃는다. 그녀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 자가 없다.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갔던, 지나치게 솔직했던,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미움을 받았던 천재 화가 나혜석. 그녀가 사람들 속에서 부활하고 있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