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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문에 갓유통권 인삼유통권을 내리노라
2012-03-02 17:10:26최종 업데이트 : 2012-03-02 17:10:26 작성자 :   e수원뉴스

정약용을 아버지 사도세자가 보내 준 인재라고 믿었던 정조. 그러나 정약용을 출사시키는 일은 어려웠다. 그가 대과에 번번이 낙방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에는 노론의 방해가 작용했다. 노론 성향의 심사위원들을 내세워 정약용에게 박한 점수를 준 것이다.  결국 1789년, 정조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시험 감독관으로 내세워 춘당대에서 특별과거시험을 열었다. 이 시험에서 정약용은 장원을 해 출사길이 열렸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화성설계를 지시했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화성에서 임금과 백성이 진정 하나 되는 대동세상을 열 것이다.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주국가의 기틀을 세울 것이다."그 뜻을 받들어 정약용은 화성을 설계했다. 

그는 그 유명한 거중기를 발명하여 작업 능률을 높였다. 거중기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기계 없이 100킬로그램을 들려면 100킬로그램의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도르래 1개를 사용하면 절반의 힘도 들지 않는다. 그래서 정약용은 거중기에 위로 4개, 아래로 4개 도르래를 설치하여 25배의 힘을 쓸 수 있도록 했다. 정조는 거중기를 사용한 이후 공사현장에서 사망사고가 일어나지 않아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정작 화성 축성 작업이 시작되었을 때 설계자 정약용은 현장에 있지 못했다. 정조의 특명으로 암행어사를 제수 받아 탐관오리들을 색출하러 전국을 누비고 다녔기 때문이다.

한편 정조는 화성행궁 근처에 위치한 팔달문에 지극한 애정을 가졌다.
팔달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물론 이는 수원의 주산인 팔달산의 맥이 팔달문까지 이어져 내려온다는 뜻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조는 이곳이 교통의 요지이자 물산의 집적지로서 사통팔달 중심지가 되리라 보았다. 실제로 이 팔달문으로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물자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팔달문은 지금까지도 풍요와 번영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팔달문에 갓유통권 인삼유통권을 내리노라_1
팔달문에 갓유통권 인삼유통권을 내리노라_1

왕이 만든 시장 '팔달문시장'

수원에는 '왕이 만든 시장'이 있다. 바로 팔달문을 끼고 넓게 자리하고 있는 팔달문시장이다. 이 시장을 만든 왕은 '정조'다.

영조는 중상주의자였다. 물론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여 민생의 기본이 되는 농업의 중요성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상업과 공업을 육성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게다가 수원을 경제자족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업이 필수적이었다. 

채제공이 제안했다. 한양의 부자 30명을 모아 각각 1천냥 씩을 주어 팔달문시장에서 장사를 하게 만들자고.  하지만 상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양반세력과 결탁해 금난전권을 비롯한 거대한 특권을 누리고 있는 한양의 상인들이 움직일 리 없었다. 대청무역으로 재미를 보고 있는 개성상인도 수원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국 수원부사 조심태가 나섰다. 
"수원에도 상업에 뜻과 재능이 있는 사람이 많사옵니다. 6만 냥 정도를 푸셔서 상인이 되고자 하는 수원백성들에게 빌려 주소서. 그리하여 팔달문시장에서 장사를 하게 하여 이윤을 올리게 되면 최단 5년에서 최장 20년에 걸쳐 나누어 갚게 하소서."

정조는 조심태의 제안을 받아들여 팔달문시장에서 장사하기를 바라는 수원백성들을 위해 6만 냥을 지원했다. 그리하여 팔달문시장에 상점들이 들어서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수원에서는 두 집 건너 한 집이 가게일 정도였다. 당시에는 가게를 '가가'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수원 가가쟁이'라는 말이 나왔고, 이 말이 변해 '수원 깍쟁이'가 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대상인들을 불러들여야 팔달문시장이 흥성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정약용의 외가인 고산 윤선도 가문이었다. 송시열을 앞세운 노론과의 대결에서 밀려난 남인의 영수 윤선도는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 그의 집안은 막강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이미 왜나라, 유구국, 청나라 등과 중개무역을 해서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윤씨 가문 입장에서는 터를 잘 닦아놓은 땅을 버리고 수원으로 간다는 것이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윤선도 가문은 정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정조와 윤선도 가문 사이를 연결하는 깊은 인연의 끈이 있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로 삼은 현륭원 자리는 원래 효종이 승하했을 때 윤선도가 명당으로 지목한 곳이다. 그러나 노론의 거두 송시열의 극렬한 반대로 그 뜻이 좌절되었다. 그런데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바로 그 자리에 쓴 것이다. 

게다가 윤씨 가문의 외손인 정약용이 정조의 총신으로 국정을 이끌어 가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더더욱 정조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고산 윤선도 가문이 팔달문시장에 자리를 잡자 사방에서 새로운 상인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들 중 다수가 양반들이었다. 일찍이 상업의 중요성에 눈을 뜬 진보적인 선비들로서 정조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었다.

팔달문에 갓유통권 인삼유통권을 내리노라_2
팔달문에 갓유통권 인삼유통권을 내리노라_2

그래서 팔달문시장은 드물게 '왕이 만든 시장'이며, 그곳 상인들은 그 뿌리를 양반에 두고 있다. 
"나와 뜻을 함께하는 저들은 소중한 동지들이다. 나를 믿고 따라와 준 저들에게 선물을 내려야겠다."
정조는 팔달문시장 상인들에게 갓 유통 독점권을 내렸다. 당시 갓은 단순한 모자가 아니라 양반의 상징이었다. 밥은 굶어도 갓은 써야 했다. 그런데 그 갓의 유통권을 팔달문 상인들에게 내린 것이다.

"뭣이? 팔달문 상인들에게 갓 유통권을 주셨다고? 잠깐, 이거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수원을 한양보다 더 크게 키우실 거라는 게 헛소문이 아니었던 게야.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번 해남 윤 씨 가문 올라갈 때 같이 묻어갈걸 그랬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팔달문 상인들에게 인삼유통권을 내리노라."
인삼은 개성상인들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서 보자면 개성보다는 수원과 거래하는 것이 시간과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팔달문시장에는 삼남 지방에서 올라온 상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우리 충청도에서 개성까지는 너무 멀어유. 그런데 수원에서 인삼을 살 수 있으니 참 좋네유."
"으따, 시간이랑 경비가 겁나게 줄었당게."
"삼남에서 개성 가모 인자 바보라 안 카나?(삼남에서 개성 가면 이젠 바보라고 하지 않나?)"

이처럼 정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왕이 만든 시장' 팔달문 시장은 90년대까지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장소로 명성을 누렸다. 특히 80년대에는 수원시내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메카로서 개성 있는 주점과 카페 등이 많았다. 

특히 이곳에는 품질이 좋으면서도 가격이 저렴한 의류브랜드 매장들이 많아 대학생과 젊은 근로자들이 즐겨 찾고 있다. 

왕이 만든 시장, 팔달문시장은 2011년 중소기업청 산하 시장경영진흥원에서 진행하는 '문화관광형시장'으로 선정되면서 옛날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새롭게 일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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