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문화유산] 정조의 사부곡…화성 융릉과 건릉
역사를 돌아보고 자연을 탐색하는 공간
2023-12-14 09:16:35최종 업데이트 : 2023-12-14 09:00:06 작성자 :   연합뉴스

[문화유산] 정조의 사부곡…화성 융릉과 건릉
역사를 돌아보고 자연을 탐색하는 공간

(화성=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조선왕릉은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자연의 미를 탐색할 수 있는 공간 중 하나일 것이다.
왕과 왕비에 얽힌 이야기를 생각해 보는 것은 물론이고 풍광 좋은 곳에 있어 계절의 변화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중 많은 사람에게 친숙한 스토리의 주인공들이 묻혀있는 경기도 화성의 융릉과 건릉을 다녀왔다.

◇ 익숙한 스토리의 주인공

조선 영조,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정조의 이야기는 여러 드라마와 영화, 문학 작품의 소재로 쓰였다.
그만큼 각각의 인물 이야기, 시대적 배경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가 많았던 것 같다.
영조실록에는 1762년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세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세자는 자신을 폐하기로 한 영조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고, 세손(훗날 정조)도 그 뒤에 엎드렸다.
영조는 세손을 안아 밖으로 내보냈다.
세자는 결국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이후에 그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그에게 사도(思悼)세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는 왕릉 조성에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왕위에 오른 정조 역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왕릉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화려하고 아름다운 융릉

늦가을의 정취가 남아있던 지난달 경기도 화성으로 향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두 시간 남짓 시간에 잎을 떨군 가로수들이 스쳐 지나갔다.
융릉과 건릉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어서 들어가는 입구가 동일하다.
왕릉 입구에 도착해 안내 지도를 살펴보니 숲길을 사이에 두고 융릉과 건릉이 표시돼 있다.
입구를 지난 뒤 몇분 지나지 않아 갈림길이 나왔다.
사도세자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을까. 융릉이 있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십여분 정도 지나자 홍살문이 보이고 그 뒤에 정자각이 눈에 들어왔다.
취재팀이 미리 촬영신청을 해 둔 터라 현지에 있던 해설사와 함께 능침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자연과 단정하게 어울리는 듯한 봉분과 주변의 석마(石馬), 문석인(文石人)과 무석인(武石人),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보였다.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봉분에 견고하게 두른 병풍석이었다.
연꽃과 모란 모양이 보였고 그 아래 돌에는 기와 모양의 무늬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화려하고 섬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했다.
사도세자가 숨진 뒤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묘가 만들어졌고, '수은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정조는 즉위 후 이를 높여 '영우원'이라 했다가 178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이름을 '현륭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정조는 11년간 12차에 걸쳐 능행을 했다. 혜경궁 홍씨는 세상을 떠난 뒤 현륭원에 합장됐고 1899년 이곳이 능으로 높여지면서 현재의 융릉이 됐다.

◇ 간결해 보이는 건릉

정조가 묻혀있는 건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0분가량 한적한 길을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역시 해설사와 동행해 능침에 올라가 보니 봉분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달랐겠지만, 융릉과 비교하면 간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건릉은 생전에 아버지 곁에 묻히고자 했던 정조의 뜻에 따라 처음에는 현릉원 근처 동쪽 언덕에 조성됐다.
이후에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하려고 했지만, 건릉의 원래 위치가 풍수상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돼 현재의 자리로 건릉이 옮겨지면서 합장릉이 됐다고 한다.
당시 정조가 처음 묻혔던 곳은 왕릉 내 숲길 이정표를 따라 조금 걷다 보면 찾을 수 있다.
그 위치가 전해지지 않다가 2011~2012년 왕릉 규모의 봉분 구역과 담장 시설, 유물이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지금은 '정조대왕 초장지'라고 적힌 안내판이 있다.
건릉의 경사진 능침에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니 뒷부분에 소나무가 병풍을 친 듯 한그루씩 단정하게 서 있다.
융릉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나무들 사이로 잠깐 잠깐씩 '쏴아'하는 바람 소리가 일었다.

◇ 시민들의 휴식공간

융릉과 건릉에는 얼핏 봐도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가족, 연인, 친구 단위의 방문객이 이어졌다.
가볍게 몸을 풀며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앞서가는 어린 자녀를 뒤따르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산책로를 따라 이동할 때면 곧게 뻗거나 조금 구부러진 소나무들의 선이 인상적으로 보였다.
숲에서 느낄 수 있는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 같았다.
흙길은 정돈돼 있었고 옆에 조성된 뜰에는 낙엽이 놓여 있었다.
그 속에 벤치가 적절히 배치돼 방문객들이 오손도손 앉아 있었다.
마치 잘 정돈된 공원의 모습이 연상됐다.
융릉에서 건릉으로 넘어가기 위해 나무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은빛의 억새가 펼쳐진 곳도 있었다.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이들의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취재팀은 이틀간 시간을 달리해서 오전과 오후에 왕릉을 방문했다.
시간대에 따라 보이는 풍경도 달랐다.
해가 비칠 때면 소나무 숲이 상쾌하게 보이다가도 해 질 녘이 되면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산책로에 있는 수종은 소나무, 전나무, 상수리나무, 잣나무, 느티나무, 오리나무 등으로 다양했다.
취재팀은 가는 곳마다 설치된 안내판 설명을 읽기 위해 여러 번 멈춰 섰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났지만, 왕릉에 대한 흥미도가 높아져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았다.
융릉과 건릉을 포함해 한국에 있는 조선왕릉 40기는 역사적,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 정조가 세운 용주사

융릉과 건릉에서 2㎞ 정도 떨어진 곳에 용주사라는 사찰이 있다.
차로 가면 몇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곳은 정조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1790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용주사는 원래 신라 때 갈양사로 창건됐다가 고려 때 잦은 병란으로 소실됐다.
시간이 흘러 정조가 빈터에 사찰을 창건한 것이다.
능침사찰로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정조와 효의왕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찰에 들어가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관찰하는 묘미가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삼문(三門)이 보인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궁궐 양식이라고 한다.
삼문을 지나면 천보루가 보이는데, 목조기둥 아래에 석조 기둥과 같은 높은 초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역시 궁궐 건축과 유사한 것이다.
중심 전각인 대웅보전의 정면 3칸 구조와 내부의 불단, 닫집의 모양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범종각에서는 문살 틈으로 국보인 용주사 동종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판에는 신라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의 범종이라 적혀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js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