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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가을볕 아래 순교의 아픔 간직한 해미읍성
2016-10-13 07:30:00최종 업데이트 : 2016-10-13 07:30:00 작성자 :   연합뉴스

(서산=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서산 여행지의 으뜸은 해미읍성이다. 지난 2012년 서산시는 서산지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인 해미읍성, 마애여래삼존상, 간월암, 개심사, 팔봉산, 가야산, 황금산, 서산한우목장, 삼길포항 등을 '서산 9경'으로 선정했는데, 제1경이 해미읍성이다.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로 나와 5분이면 조선 태종 17년(1417)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해 세종 3년(1421)에 완성된 해미읍성에 닿는다.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의 해미(海美)라는 지명은 조선 시대부터 사용됐다. 태종 7년(1407)에 오늘날 당진 서부지역인 여미현(餘美縣)과 해미지역의 옛 명칭인 정해현(貞海縣)이 합치면서 여미와 정해에서 한 글자씩 따서 해미라고 이름 짓고 태종 13년(1413)에 해미현 관아를 두었다.
태종이 1416년 서산 도비산에서 강무(왕이 참석한 군사훈련 겸 수렵대회)를 하다가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주변 지역을 둘러보게 됐는데 당시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해 덕산에 있던 충청병영을 해미로 옮겼다. 읍성이 완성된 후 충청병마도절제사가 부임했고, 예산·온양·당진 등 인근 12개 군영을 관할했다. 소속된 군병은 4천여 명이었고, 효종 2년(1651)에 청주로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선조 2년(1579) 훈련원 교관으로 부임해 열 달 정도 근무하기도 했다.
이흥란 문화관광해설사는 "동학농민운동을 경험한 일제는 국권을 강탈한 1910년에 읍성 철거령을 내렸고, 전국의 읍성과 산성의 대부분이 허물어졌다"며 "해미읍성도 성 내 땅들이 민간인들에게 헐값으로 팔렸지만 원형이 잘 보존된 평지성"이라고 말한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90여 가구가 해미읍성 안에 살았다고 한다.
◇ 조선 500년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읍성
사적 제116호인 해미읍성은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과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읍성으로 꼽힌다. 성벽의 높이는 약 5m, 둘레는 1.8㎞로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다. 성벽 외부는 잘 다듬은 성돌을 쌓아올리고, 그 안쪽은 작은 돌과 흙으로 채워 넣는 내탁식(內托式) 성벽을 갖춘 평지성이다. 크고 작게 쌓인 돌들은 해미읍성이 지나온 역사를 머금고 있다. 성 외벽의 성돌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주, 청주, 임천, 서천, 부여 등 희미하게 고을명이 새겨져 있다. 축성 당시 고을별로 일정 구간의 성벽을 나누어 쌓게 함으로써 성벽이 무너질 경우 그 구간의 고을이 책임지도록 한 일종의'공사 실명제'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읍성 전체를 감싸는 해자(垓子)를 설치했다. 현재 동문과 암문 사이의 일부 해자가 복원돼 있고, 진남문 해자 구간 시굴조사가 마무리됐다. 서산시에 따르면 정밀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해자 복원계획을 세우고, 문화재청의 발굴·현상변경 허가 등 행정절차를 거친 뒤 2019년 본격적으로 해자 복원을 추진할 방침이다. 해미읍성을 '탱자성'이라고도 부른다. 기록에 의하면 성벽과 해자까지는 5m 내외의 공간이 있는데 적의 진입을 지연시키기 위한

<문화유산> 가을볕 아래 순교의 아픔 간직한 해미읍성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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