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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이매진] 보령 성주사지
2018-02-12 08:01:01최종 업데이트 : 2018-02-12 08:01:01 작성자 :   연합뉴스
최치원의 명문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절터
(보령=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숭엄산(嵩嚴山)이라 불리던 충남 보령 성주산(聖住寺·667m) 자락에 터를 잡은 성주사지(聖住寺址·사적 307호)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백제 29대 법왕이 전쟁에서 죽음에 이른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오합사'(烏合寺)라는 호국사찰을 세웠고, 백제 멸망 직전 적마(赤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이 절을 돌아다니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시했다고 전한다.
헌덕왕 14년(822) 신라의 웅천주(熊川州:지금의 공주)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난 등 대규모 전란으로 폐허가 됐고, 신라 문성왕 7년(845) 당나라에서 선종(禪宗)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무염(無染, 800∼888) 대사가 이곳에 성주사(聖住寺)를 창건했다.
통일신라 말기 왕실과 진골 세력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발전한 교종이 점차 그 힘을 잃어가고,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이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가 성주산문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다. 번창하였을 때는 2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하던 선종 불교의 중심지였고 절에서 쌀 씻은 물이 성주천을 따라 십 리나 흘렀다고 한다. 당시 성주사를 모르면 '일세의 수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창했다. 심광·대통·여엄·자인 등으로 이어지는 성주산문의 문도들은 지방호족, 왕건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고려 시대에도 대가람으로 번성할 수 있었다. 성주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 중반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8년 동국대학교박물관의 조사를 시작으로 2011년까지 13차례에 걸친 학술조사 끝에 건물의 초석, 백제와 통일신라 때의 수막새, 명문이 새겨진 조선 시대의 암막새, 흙으로 빚은 소조상(塑造像) 파편 등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4만5천㎡ 규모의 성주사지에서 가장 도드라진 유적은 국보 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光塔碑)다. 신라 최고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崔致遠)이 진성여왕의 명에 따라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쓴 비문으로, 신라 석비 중 가장 크다.
거북 받침돌 위에 세워진 높이 4.55m의 비석에는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진골이던 무염대사의 성장과 출가, 중국에 유학하여 공부하는 과정, 귀국하여 성주사를 일으키고 불법을 전하는 과정, 골품제, 통일신라 시대 사회상 등이 5천120자에 낱낱이 기록돼 신라 신분제도와 사회상, 고어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 해체·보수했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연합이매진] 보령 성주사지

[연합이매진] 보령 성주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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