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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우리동네] 대원군도 인정한 호남 유학의 본향 장성
2017-12-30 11:00:00최종 업데이트 : 2017-12-30 11:00:00 작성자 :   연합뉴스
반경 10㎞ 안에 김인후·기정진 등 성리학자 고향 많아
필암서원·백비 등 선비 관련 유적도 곳곳에 수두룩
(장성=연합뉴스) 김재선 기자 =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전남 장성역 앞에 선 큼지막한 선돌에 적힌 문구다. 글[文]로는 장성만 한 데가 없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조선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전라도 53개 고을을 둘러보고 장성을 두고 했다는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했을까.
30대의 젊은 고봉(高峰) 기대승이 당대의 거유(巨儒) 퇴계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실상 장성을 시발지로 삼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논쟁 제기에 앞서 고봉은 당대의 또 다른 거유로 인근 장성 땅에 사는 하서(河西) 김인후와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주제로 하는 또 다른 성리학 토론을 벌인다. 여기서 자신을 얻은 그는 마침내 퇴계를 향한 비판을 개시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 유학계를 뜨거운 철학논쟁으로 이끈 이들 세 사람 중 하서가 장성 출신이며, 고봉은 장성과 바로 붙은 지금의 광주 광산구 태생이다.
최근 '옐로시티' 마케팅으로 떠오르는 장성은 2017년 말 현재 인구 4만7천여 명에 불과한 작은 고을이다. 이 작은 고을이 동시대 경북 안동에 비견하는 조선 시대 호남 성리학의 본고장이다. 흥선대원군이 이 고장을 저리 평가한 까닭이다.
◇ 과거시험 초장엔 포천 선비, 종장엔 장성 선비
그만큼 장성은 예로부터 문필의 고장, 즉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했다. 조선 시대 과거시험 초장(첫 시험)에는 경기도 포천 선비가 많고, 마지막 시험장인 종장에는 장성 선비가 많다는 '포초장추(抱初長推)'라는 말이 만들어졌을 정도다.
장성은 선비와 청백리가 많다 해서 호남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도 한다. 추로는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고장인데 이를 빗대어 장성이 그렇게 일컬어진 것이다.
반계(磻溪) 유형원(1622∼1673) 역시 '동국여지지'에서 "(장성) 선비가 문학을 숭상한다(士尙文學)"고 평하기도 했다. 문학은 유학까지 포함한 말이니, 그만큼 장성 선비들이 유학을 열심히 공부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황룡강을 따라 펼쳐진 비옥한 평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장성은 기라성 같은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 필암서원 등 선비 관련 유적들 많아
장성을 대표하는 유림 유산이 필암서원(筆巖書院)이다.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도 온전함을 유지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7대 서원 중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도 추진 중이다.
김인후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인과 선현들을 기리는 사당인 문묘(文廟)에 배향된 18현 가운데 호남 유일의 선비다. 세자 시절 인종을 가르치다가 인종이 승하하자 낙향해 학문을 닦으면서 평생 후학 양성에 힘썼다.
충의와 의리를 통해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 김인후의 유학 정신은 호남의 의병운동, 나아가 광주민주화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 1만 개 눈보다 나은 외눈박이 기정진
김인후와 기대승 뒤 호남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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