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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이매진] 그때 그 시절,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2017-07-09 08:01:01최종 업데이트 : 2017-07-09 08:01:01 작성자 :   연합뉴스

(인천=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성당 2층 창 너머로 보이는/ 황토빛 저 흙더미 속엔/ 내가 살던 집이 묻혀있다./ 내 아이의 어줍잖은 그림도/ 깨진 항아리도/ 낡아서 버린 구두도…/ 슈퍼, 약국, 목욕탕, 연탄집/ 모두 저 황토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민희네 정우네 창수네 선진이네…/ 저녁 어스름 해 기울고/ 황토는 말없이/ 세월을 삼킨다."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의 상설전시실 한쪽에 걸려 있는 허선화의 시 '수도국산 달동네.1'에서는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웃으며 살 수 있었던 달동네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향수가 배어난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기형도(1960∼1989)의 시 '엄마 걱정'을 읽다 보면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오직 어머니를 기다리는 소년의 삶이 눈물겹다. 그 시절, 우리는 어쩌면 모두 그토록 가난했던가.
달동네란 이름은 마을이 높은 산자락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의미와 '월세방이 많다'는 이유에서 붙여졌다. 달동네가 처음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다. 일제의 수탈을 피해 산언덕에 삶을 이룬 '토막민촌'이 시초다. 이후 한국전쟁과 산업화 과정에서 '판자촌 달동네'가 급격히 늘어났고, 도시 빈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달동네라는 용어가 널리 쓰인 것은 1980년 당시 시청률 67%를 기록했던 TV 일일연속극 '달동네' 방영 이후다.
달동네박물관이 있는 수도국산(水道局山)은 소나무가 많아서 송림산(松林山), 만수산(萬壽山)이라고 불리던 야트막한 산꼭대기로 인천 변두리 달동네였다. 인천의 근대화 과정을 기록한'인천석금'(仁川昔今)에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갑진년(1904) 왜병이 전환국(현 전동) 자리 근처에 주둔하였는데, 이때 이곳 주민들을 강제로 철거시켜서 송현동 산언덕에 새로 주거를 정해 주었다고 한다"고 기록돼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에게 쫓겨난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1908년 이곳에 송현배수지가 준공되자 그때부터 수도국산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이어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피란민들이 몰려들었고, 급격한 산업화로 일자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도 달동네 주민으로 합류했다. 산꼭대기까지 판잣집이 들어차면서 수도국산은 3천여 가구가 모여 사는 달동네가 됐다. 지금은 달동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서현석 박물관 팀장은 "인천 동구청은 2005년에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가던 달동네 옛터에 근현대생활사 박물관을 세웠다"며 "달동네박물관은 노장년층에게 정겨운 시절 추억 속으로의 시간 여행을, 어린이와 젊은층에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살았던 기성세대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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