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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고 흩어짐이 준엄하다..고성 건봉사
2013-11-11 15:31:53최종 업데이트 : 2013-11-11 15:31:53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가을낙엽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만추(晩秋)의 계절 11월 초순, 강원도 인제를 지나 고성 거진읍 냉천리에 있는 건봉사(乾鳳寺)에 도착했다. 민족의 영산 금강산이 남쪽으로 뻗어 내린 끝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다. 

코앞엔 남북으로 나뉜 휴전선 통일전망대가 있다. 아픈 민족의 분단을 말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곳으로서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똑똑히 지켜보고 있는 사찰이다. 또한 금강산으로 통하는 초입의 경계이기도 하다.

모이고 흩어짐이 준엄하다..고성 건봉사_1
모이고 흩어짐이 준엄하다..고성 건봉사_1

신흥사 말사지만, 한때는 조선 4대 사찰이었다

1962년 비구· 비구니의 독신 수행자만을 인정하는 통합종단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했다. 육조혜능의 남종선(南宗禪)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여와 조계선풍을 불러일으킨 도의선사를 종조로 추앙하고, 보조국사를 중천조(重闡祖)로, 보우국사를 중흥조(重興祖)로 삼아 조계의 법맥이 조선시대를 거쳐 당대에 이르게 했다. 즉, 선종중심의 선(禪)가풍을 전면에 내세워 한국불교 전반을 아우르는 선교율이 융합된 종풍이 대한불교조계종이다.

모이고 흩어짐이 준엄하다..고성 건봉사_2
모이고 흩어짐이 준엄하다..고성 건봉사_2

지금이야 신흥사 말사로 되어 있지만 6· 25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제강점기만하더라도 우리나라 4대사찰의 하나로 대가람의 위용을 뽐내던 곳이 바로 고성의 건봉사다.

520년 아도 스님이 원각사란 절을 창건한 이래 8세기 중엽(758· 경덕왕17) 31인의 승려와 신도 1,820명이 참여했다는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가 삼국유사에 나올 정도로 유명했고, 불교가 흥했던 고려시대에 건봉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유교를 국교를 삼았던 조선시대에도 특별히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흥했다. 

물론 19세기 말 두 번의 화재 등 쇠락이 이전에도 있었지만 끊임없는 중수와 중건불사가 이어져 대가람을 유지했다. 일제시대 말, 도량이 40여 동이었고 건물과 암자가 800여 칸에 달했던 호시절(好時節)을 이어오다 단 한 번의 전란으로 말미암아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건축물이 초토화 되면서 위용은 사라졌다. 

때론 폐사지가 역사를 말해준다

1953년 휴전이 되었지만 이곳 민통선북방은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었다. 오직 부근 국군 장병들의 신앙의 장소로만 제공되면서 간신히 명맥만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92년에 가서야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출입이 가능해지면서 영화로웠던 옛 풍광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산세와 지세가 보통이 아님을 사찰 입구 땅을 밟는 순간 몸과 마음이 알아차린다. 

'건봉사사적기', '조선고적도보' 등 남아있는 문헌이나 사진에서 그간의 연혁을 상세히 알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론 단 하나의 문화유적이 혹은, 폐사지가 지나온 역사를 넌지시 일러주기도 한다. 이곳, 건봉사의 첫 느낌이 그랬다. 도력이 높은 선사들의 수행터였다는 것을 침묵으로 알려주는 사찰이랄까.

모이고 흩어짐이 준엄하다..고성 건봉사_3
모이고 흩어짐이 준엄하다..고성 건봉사_3

조선 유학자들의 탄압으로 대부분의 사찰이 산중으로 자리하면서 스님들은 수행의 장소로서 본성을 찾기 위해 온몸을 불사르며 수행했던 곳 중에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을 거란 생각이 절로 일어난다. 

1920년대에 조성한 '불이문'과 대승불교의 기본수행법인 '십바라밀석주'가 전쟁 통에서도 살아남은 가운데 동쪽 대웅전과 승원 등이 조성됐지만 서쪽 대석단 위로 보이는 옛 가람 터는 그야말로 서릿발처럼 매서운 기운으로 피안(彼岸)의 세계와 차안(此岸)의 세계를 나누며 준엄함을 보여준다.
또 둥근모양의 홍예 능파교(凌波橋) 아래에 흐르는 물은 불자들의 무량신심이 흐르는 듯했고, 처처의 풀과 나무에선 세상과 절연한 선사들의 수행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우리나라 사찰이 모두 그러그러하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다수겠지만 서쪽의 범종각, 나무아미타불의 글씨가 쓰인 석주와 낙서암 외에 빈 공터 전경은 영혼의 큰 울림이 되어 감동을 준다. 한참 눈을 감고 서있으면 어느새 가벼운 몸이 되어 스르르 풍선처럼 날아오르는 듯 평화를 안겨준다.

진신사리 친견, 그 와중에서 느끼는 경계

저무는 가을 녘에 만난 건봉사의 위엄은 단언컨대 사명대사가 모셔놨다는 진신사리탑에서 느낄 수 있다. 일명 세존영아탑이라 불리는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봉안한 곳, 적멸보궁이다. 1605년(선조 38)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되찾아온 것으로 1724년(경종 4) 이곳에 모셨다. 

제일 먼저 찾았다. 그래야 예의라 생각했으니. 친견을 위해 종무소를 지나고 봉안한 곳 바로 앞에서 합장을 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서니 황금색 반석 위에 놓인 부처님의 치아가 빛을 발한다. 

그런데 순간 '커도 참 크시다'는 생각이 들면서 의구심이 발동했다. '진짜일까, 가짜일까'라는 불경스런 생각이. 
그 순간에도 경계가 찾아든다. 거듭해서 합장하며 그 마음을 바라본다. 그리고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다. 

모이고 흩어짐이 준엄하다..고성 건봉사_4
모이고 흩어짐이 준엄하다..고성 건봉사_4

종교는 원대하다

우리의 삶과 늘 함께한 사찰(혹은 타 종교)은 거대한 우주공간이나 진배없다. 그렇다고 거대하고 심오하게, 혹은 신비롭고 광활하게 생각하고 대할 필요는 없다. 
늘 우리일상처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보편이란 '널리 고루고루 여기 저기 있다'는 것이니 평범한 삶으로 받아드리면 되는 것이 종교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종교를 찾아 사색하고 여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직선에서 곡선으로, 바쁨에서 느림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꼭 믿음을 갖지 않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니 아주 가끔은 찾아볼 일이다.

나는 천오백년의 고찰 건봉사에서 모이고 흩어지는 세월의 흔적을 경험하며 놀라워했다. 그리곤 '생사일여'를 깨달은 고승들의 자취를 보았다. 

추신: 건봉사 탐방기는 지난 8일부터 2박 3일 동안 진행된 'e수원뉴스 워크숍'을 다녀온 후 개인적으로 느낀 기행문임을 밝힙니다. 
여타의 문화재와 전통시장 탐방, 기사작성요령 교육 등 시민기자로서 갖춰야할 역량강화를 위해 알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준비한 수원시에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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