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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길 걸으며 떠나는 가을과 작별인사를 한다
단풍이 사람보다 아름답다
2013-11-12 10:24:21최종 업데이트 : 2013-11-12 10:24:21 작성자 : 시민기자   홍승화

봄에는 꽃구경, 가을에는 단풍구경으로 고속도로가 막힐 때, 난 직장생활과 세 아이 뒷바라지로 나들이객에 섞여본 적이 없다. 그래서 벼르고 잡은 날이 오늘이다. 5시 넘은 시각. 해 돋는 시간이 늦어져 밖은 어둠을 덮고 깊게 잠들어 있다. 
창문으로 스며든 새벽 공기가 침대 위 내 몸을 휘감는다. '내일은 전국에 비 소식'을 전하던 어젯밤 일기예보까지 생각나 일어날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아~~가기 싫다"며 깨우는 남편을 뿌리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사진 찍으셔야지요."옆에서 자고 있던 막내아들 녀석이 잠결에 한마디 던진다. 묻어있던 잠기운이 생선 비늘 떨어지듯 털려나간다.

쉬지 않고 내달려 8시 전 내장산 국립공원 진입로에 도착한다. 제각각의 색으로 물든 잎들이 나무 기둥에 수북이 달려있다. 주차장엔 세 명의 주차요원이 들어오는 차들을 차곡차곡 채우느라 바쁘다. 부지런한 관광객들 상대로 이른 아침식사를 파는 식당 안도 분주하긴 마찬가지다. 따듯한 콩나물 해장국으로 차가워진 몸을 데운다. 편의점에 들러 막걸리 한 병과 김밥 두 줄, 달걀 두 알, 물 한 병을 산다. 체력 보충용 비상식량이다. 

단풍길 걸으며 떠나는 가을과 작별인사를 한다_1
단풍길 걸으며 떠나는 가을과 작별인사를 한다_1

내장탐방지원센터와 탐방안내소 사이를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있지만 걷기로 한다. '명불허전'내장산 단풍을 최고로 치는 이유가 그 길에 있다. 선홍색 이파리 사이로 주홍색, 갈색, 노란색, 연두색들이 의기양양 제 색을 뽐내고 있다. 여름옷을 벗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녹색 잎, 또 다른 가을 냄새를 풍긴다. 화려한 잎들 아래 얼기설기 엮여있는 가지들이 터널을 만든다. 단풍터널이다. 

아침 햇살이 잎사귀 사이에 스며들어 붉은 등이 켜진다. 노랗게 물든 키 작은 단풍나무는 별모양의 잎만 다를 뿐 은행나무라 불러도 되겠다. 모든 나무가 주인공인 공연장에 DSLR 카메라를 맨 사진작가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빛의 양에 따라 색깔이 시시각각 변하는 요술쟁이를 어찌 한 컷의 사진으로 담을 수 있겠는가.

4km 단풍 길을 누구의 재촉도 받지 않고 유유자적 걷는다. 미동의 바람에 석류빛 단풍잎, 망고빛 은행잎이 휘날린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일찍 서두른 내게 이슬에 몸단장한 단풍잎이 첫인사를 한다. 하얀 눈 위에 발자국 찍듯이, 낙엽에게 내 정체를 알린다. 바스락바스락 낙엽소리가 고요한 아침을 일으킨다. 낙엽의 첫 입맛춤이다.

단풍길 걸으며 떠나는 가을과 작별인사를 한다_2
단풍길 걸으며 떠나는 가을과 작별인사를 한다_2

일주문 근처 연못엔 파란색 지붕의 우화정 정자가 있다. 사방을 단풍으로 에워싸고도 모자라 단풍든 물에 발 담그고 있다. 
일주문 오른쪽 언덕으로 오른다. 매달린 단풍이 떨어진 낙엽보다 많다. 연두색 잎, 키 큰 느티나무가 을씨년스러운 가을 산을 따듯하게 품어준다. 석축과 단풍나무 사이로 벽련선원의 건실한 기둥이 보인다. 끝자락만 주홍물이 든 다리 짧은 단풍나무가 돌담과 키 재기를 하고 있다. 

대웅전 지붕 위의 서래봉을 감상하고 벽련선원 툇마루에 앉아 땀을 식힌다. 한 관광객이 공짜로 좋은 구경 시켜주겠다며, 툇마루에 누워 서래봉을 보라고 한다. 신발을 벗고 대웅전 쪽으로 머리를 두고 눕는다. 하늘 위에 서래봉이 매달려 있다. 파란 하늘이라면 서래봉이 바닷물에 잠긴 듯 보일 텐데…….절경을 보게 해 준 분에게 감사인사하는 것을 놓쳤다. 더 멋진 절경을 덮어버린 뿌연 하늘에겐 투정을 부려본다.

단풍길 걸으며 떠나는 가을과 작별인사를 한다_3
단풍길 걸으며 떠나는 가을과 작별인사를 한다_3

산에 오를수록 단풍은 드물고, 발밑 낙엽만 소복하다. 낙엽 밑 숨겨진 돌을 잘못 밟으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조심조심 걷는 오르막이 예사롭지 않다. 짓밟힌 낙엽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었다. 주말에 다녀간 등산객이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치 구경하기에 안성맞춤인 작은 봉우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다. 벽련암과 내장사 감색 기와지붕이 겹겹이 쌓인 나무 틈에서 아늑한 꿈을 꾸고 있다. 하나는 '암자'이고, 하나는 '절'인데 규모가 엇비슷하다. 사이좋은 형과 아우 같다. 

가파른 사다리를 오르고, 암벽에 달린 밧줄에 매달린다. 높이 올라갈수록 가을은 멀어진다. 구름 위에 갇힌 해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흐른 땀으로 몸이 데워져, 잠깐 엉덩이를 붙이면, 땀이 식으면서 몸의 열을 뺏어간다. 오르내리는 봉우리만큼 내 몸도 데워졌다 식었다를 반복한다. 막걸리 한 잔과 달걀로 기운을 차려보지만 내 앞에 펼쳐진 여섯 봉우리가 막막할 뿐이다. 

불출봉 정상은 등산객으로 만원이다. 도시락을 펼쳐놓고 수다 삼매경에 빠진 중년의 아주머니들. 산 아래라면 들을 수 없는 싱그러운 웃음소리다. 망해봉 정상에 앉아 사과를 깎아 먹는데, 한 등산객이 좋은 자리 잡았다고 부러워한다. 용산 저수지를 등지고 앉아, 바라보는 올망졸망한 봉우리가 장관이다. 

연지봉 정상은 넓다. 작은 돌 위에 걸터앉아 아껴놓은 김밥 두 줄을 꺼낸다. 앞 뒤 꼬다리를 빼 버린 짧달막한 김밥. 달랑 두 줄 산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꿀맛이다. 벌써 한시가 넘은 시각. 이런 속도로 걸으면 다섯 시 전에 내장사 도착이 힘들 것이다. 
까치봉에는 겨울바람이 분다. 통로에 버젓이 자리 잡고 컵라면을 먹는 등산객이 있다. 따끈한 국물이 부럽고, 그립다. 더 이상 산행을 고집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해 하산 길을 찾는 남편. 신성봉, 연자봉, 장군봉이 한 치 앞에 펼쳐져 있는데 포기하기 못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내심 내 마음을 남편은 읽은 남편이 고맙다. 

올라온 만큼 내려가야 한다. 다리 힘이 풀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 한다. 올라가는 길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길이라면 내려가는 길은 감지덕지(感之德之)의 길이다. 쉴 집이 있어 다행이고, 만날 가족 생각으로 행복하고, 같이 걸어주는 이가 사랑스럽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다. 어찌 보면 내려가는 길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산에 오르는지도 모른다. 

단풍길 걸으며 떠나는 가을과 작별인사를 한다_4
단풍길 걸으며 떠나는 가을과 작별인사를 한다_4

까치봉 입구에서 내장사까지는 산책하기에 좋다. 아리따운 단풍이 아침만 못하다. 등산으로 지친 발바닥이 낙엽 쌓인 푹신한 길을 밟으며 호강한다. 내장사에는 발 디딜 틈 없다. 명동 한복판, 유명 연예인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 속에 있는 것처럼 떠밀려 걷는다. 아침 산책길이 호사였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는 노래 가사는 틀렸다. 오늘만큼은 단풍이 사람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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