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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생이 보내 준 선물
일년 먹을 쌀이 왔어요
2013-11-21 20:03:40최종 업데이트 : 2013-11-21 20:03:40 작성자 : 시민기자   문예진
시동생이 보내 준 선물_1
시동생이 보내 준 선물_1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에 택배가 왔다. 고향에 있는 시동생에게서 우리 가족이 일년동안 먹을 쌀이 온 것이다.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자칫 폐가가 될 뻔한 고향집을, 지금은 막내 시동생이 지키며 살고 있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6년 동안을 아버님 혼자 시골에서 생활하실 때, 광주에 살던 막내 시동생 부부는 일주일에 한번 씩 아버님을 찾아 뵀다. 반찬도 만들어 드리고, 말동무도 해 드리면서 멀리 산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 뵙지 못하는 형과 누나들의 몫까지 챙기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막내 시동생은 또 큰 결심을 했다. 부모님이 사시던 고향집을 지키기 위해 이사를 결심한 것이다. 

나의 시댁은 전라남도 곡성군이다. 시골 중에서도 시골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순으로 폐교가 되면서 지금은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몇 십분씩 차를 타고 가야만 하는 그런 곳으로 가족 모두를 데리고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고 직장이 없어서 농사를 짓기 위해 간 것도 아니다. 그런대로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는 시동생은, 시댁 가까운 곳으로 전근을 신청 하면서까지 고향집을 지키고 있다. 

시골에 애착이 많던 시동생은, 결혼 전 부터 본인 명의로 논을 사들이며 농사 짓고 사는 시골 살림을 꿈꾸었다. 아버님 생전에 한우를 제법 키우고 있던터라, 아버님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시동생네는 바로 이사를 했다. 논농사야 시동생이 직장을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돌본다지만, 날마다 먹어야 하는 소는 온전히 막내동서의 몫이 되어 버렸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시동생을 따라 그 뜻을 존중하고 기꺼이 함께 해준 막내동서도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렇게 힘들게 농사지은 쌀을 보내온 것이다. 부모님께서 보내 주실때도 물론 고맙고 감사한 마음은 당연히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편한 마음으로 받았는데, 시동생이 보내주는 쌀은 고마우면서도 조금은 불편하다. 
시부모님께서 살아 계실때는 모든 농산물이 풍족하게 보내져서 아까운줄도 모르고 살았다. 추수때가 되면 햅쌀이 어김없이 올라오는데 지난해 먹던 쌀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서, 그것부터 먹다보면 새 쌀이 헌 쌀이 되어 버리기도 했으며, 새로 온 햅쌀을 맛만 보겠다며 먹다 보면 묵은 쌀은 먹기가 싫어져서 결국은 떡을 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준 적도 있다. 

시부모님이 보내실때보다 양은 많이 줄었지만 지금은 아이들도 집에서보다 밖에서 먹을때가 많아 예전처럼 쌀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 택배로 보내지는 쌀의 무게도 예전과는 다르다. 예전에는 쌀 한포대가 40kg이어서 혼자 들기 힘들었는데, 요즘은 20kg으로 줄어서 택배기사님들이 조금은 덜 힘들 것 같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나에게 쌀, 보리는 많은 추억을 가져다 준다. 같은 나이대라도 살았던 지역에 따라 경험한 일들이 차이가 나는데, 내가 살았던 곳은 시골 중에서도 정말 시골이었나 보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50~60대 이상에서나 겪었을법한 기억을 나는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농번기라는게 있어서 며칠씩 학교를 쉬어 주곤 했다. 농사를 짓지 않던 우리 집에서는 보통의 방학처럼 학교를 가지 않고 노는게 내가 하는 일 이었으므로 나는 농번기가 참 좋았다. 

그렇지만 대부분 농사를 짓는 다른 친구들은 나와는 사정이 달랐다. 모두들 논에 나가서 어른들과 함께 일을 하고, 동생을 돌보고, 나무로 불을 때서 직접 밥을 하기도 했다. 농번기방학이 아니어도 집에 일손이 필요하면 학교를 결석 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부모님을 대신해서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하는 친구는 학교를 빠지기 싫어 동생을 업고 등교를 하기도 했다. 

보리베기철이 되면 우리들도 손에 낫 한 자루씩을 들고 인근 동네로 지원을 나갔다. 어쩌다 하는, 한 두 번의 행사가 아닌, 자주 일어났던 일 중의 하나다. 아직 기계화가 되기 전, 빨리 보리를 베어내고 모를 심어야 하는 농부의 입장에서는 별로 도움도 될 것 같지 않은 초등학생 고사리손들까지 필요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집에서 늘 하던 일이라 익숙한 솜씨로 보리를 베어나가는가 하면, 일이 서툴던 친구들은 손을 다치기도 하며, 그렇게 보낸 시절이 있다. 그렇지만 가을철, 벼가 익어서 수확을 할 때는 아무리 일손이 급해도 우리가 벼를 베러 나간적은 한 번도 없었다. 

쌀농사를 지어 수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어린 우리들에게 절대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벼 베기가 모두 끝났을 때 쯤이면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가 하나 있다. 바로 이삭줍기다. 추수가 끝난 논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오라는 거 였는데 할당량이 일인당 두 되 정도씩 되었던 것 같다. 의도는 좋지만 집에 쌓여 있는 낟알을 두고 누가 남의 논을 돌아다니며 이삭을 줍겠는가. 아무튼 그때 모은 쌀이 꽤 되었을텐데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알 수 가 없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대부분의 과정을 기계가 해 내지만 그래도 사람의 손길이 가야만 하는 과정이 또한 많아서 여전히 농사짓는 일은 힘든 일이다. 그렇게 힘들게 농사 지은 수확물을 보내주는 시동생이 참 고맙다. 
아버님이 키우시던 한우 대신, 지금은 당나귀를 키우고 있단다. 당나귀는 이야기책에나 나오는 동물인줄 알았는데 식용으로서의 판로도 좋은편이라 몇 마리를 시험 삼아 키우고 있다는데, 고향을 사랑하는 막내 시동생이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그곳에서 삶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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