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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박물관대학 북한산성 행궁터를 찾아가다
2013-11-14 12:55:30최종 업데이트 : 2013-11-14 12:55:30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아침에 최명길은 서장대 아래쪽 암문으로 성을 나왔다. 임금이 내관을 수문장에게 보내 최명길의 행선지를 묻지 말고 문을 열어주라고 일렀다. 서문에서 삼전도 청의 본전까지는 내리막 산길로 반나절이었다. (학고재· 남한산성 160p)

1636년(인조14년) 12월 14일 청(淸)이 쳐들어오자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다음날 강화도로 옮기려 하였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이듬해 1월 30일 남한산성 서문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세 번을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끝으로 남한산성 항쟁은 막을 내렸다. 윗글은 그 와중에 신하 최명길이 화친을 위해 국서를 들고 청의 진영으로 들어가는 대목이다.

행궁은 정궁(正宮)과는 달리 임금이 궁궐을 벗어나 거둥할 때 머무는 별궁이다. 임시궁궐이라 할 수 있는데 행궁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조성되어왔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에 40여건의 행궁관련 기록이 나오고, 조선시대에는 전시기에 걸쳐서 조성되었다. 
그러나 전기는 보통 온양행궁, 이천행궁 등 별궁으로서의 휴식처였지만 임진· 병자호란 양란을 치루면서 왕실의 보장처로서의 역할로 다소 바뀌었다. 서두에 인용한 남한행궁을 비롯해 후기에는 북한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화성행궁, 과천행궁 등이 건립되었다.

화성박물관대학 북한산성 행궁터를 찾아가다_1
북한산성을 쌓은 후 서쪽의 방어를 위해 한번 더 성을 쌓으라는 숙종임금의 명에 의해 중간에 쌓은 성문 '중성문'이다

13일 아침, 수원화성박물관대학 수강생들 40여명이 북한산성에 있는 행궁지를 찾아 나섰다. 이곳은 양란을 겪고 난 후 확실한 왕실의 보호를 위해 축성한 행궁이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한산성처럼 전란을 겪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초반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행궁은 대홍수로 산사태를 맞이하면서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100여년이 지날 즈음 역사속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이야기가 다시 세간에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구중궁궐(九重宮闕) 속 북한행궁 이야기다. 

언제 사라졌나?

북한행궁은 1711(숙종37) 북한산성이 축성되면서 왕실의 보장처가 필요하다는 신하들의 요구에 따라 건립한 산중 깊은 곳에 자리한 장기적 항전 대비 행궁이다. 그해 8월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5월 10개월간의 공사가 마무리 됐다. 1745년 북한산성 승군의 총대장인 총섭을 지낸 성능대사에 의해 편찬된 '북한지'에 따르면 내전과 외전, 대청, 수라, 중문, 외행각방 등 총 115칸이다. 

이후 60여년이 흐른 후 '만기요람'에 의하면 행각과 월랑이 합해져 총 129칸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시일이 지나면서 보태진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다시 돌아가서, 1712년(숙종 38)행궁이 완성될 무렵 숙종은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19세)를 데리고 동장대에 올랐다. 
그리고 이후 이곳을 찾은 왕은 1760년과 72년, 79세라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또 한 차례 방문한 영조 임금이다. 1712년 아버지 숙종과 함께 오른 후 60년이 지난 후 다시 찾은 의미는 아마도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이어처(移御處)로서 이곳을 지목하였다 하니.

그러나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고 그간 산성방수체제에서 도성수호체제로 바뀌면서 방어체제에 대한 변화를 맞는다. 이후 보각을 설치하며 왕실의 어보, 어책, 의궤 등 중요 유물들을 보관하는 사고로서 전용된다. 고종연간까지 그 기능을 유지하다 1909년 소격동에 위치한 종친부로 이장하면서 본연의 기능은 상실되고 1912년 영국교회에 10년간 별장식으로 건물이 대여되기도 했다.

화성박물관대학 북한산성 행궁터를 찾아가다_2
남아있는 성벽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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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박물관대학 북한산성 행궁터를 찾아가다_3
북한행궁지, 내전의 흔적이 나타났다. 경기문화재단 박현욱연구원이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1915년 8월 대홍수가 발생하면서 행궁 일대는 산사태로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크고 낮은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려 쌓여 비밀정원 같았던 이곳이 아이러니하게도 산사태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북한행궁 다시 역사 안으로!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잊혀져있던 북한산성과 행궁은 1991년 서울대학교박물관의 북한산성 지표조사와 1999년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의 고양 북한산성행궁지 지표조사를 통해 그 존재가 드러났다. 
이후 2011년 경기문화재연구원 주체의 북한산성 3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리면서 불이 밝혀졌다. 이에 경기도와 고양시 그리고 경기문화재단이 협력하여 북한산성문화사업팀이 출범되고 2012년부터 연차적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2016년까지 5차 발굴에 앞서서 현재 1단계를 마친 상태다.

1712년 4월 숙종 임금은 구파발을 거쳐 산성에 올랐다. 
우리 또한 300여년이 지난 지금 임금의 뒤를 잇는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깊은 산중답게 그곳은 이미 가을의 끝자락을 넘어 겨울 초입이었다. 손과 발은 시렸고, 계곡물은 곳곳에 살얼음이 끼었다.
성의 총 길이는 12.7km, 구간마다 지역의 특성에 따라 높고 낮음에 차등을 두었다. 모두 돌아본다는 것은 희망뿐, 오늘 우리들의 종착지는 북한산성행궁터다. 도보로 약 2시간 거리다. 

산성의 서쪽 북한산성교육정보센터를 지나 대서문을 통과하고 하창지(아래쪽 창고)를 거쳐 중성문에 다다랐다. 앞으로 행궁지까지는 보통 30여분이면 도착한다지만 잘 가꾸어진 등산로에도 불구하고 5대 악산답게 걷기에 만만치 않은 걸림돌이 무수했다. 

간간이 옛 마을 '북한동'의 터와 조우하기도 하고, 조선 유학자들이 금강산처럼 명승지로서 무지하게 찾았다는 산영루지(현재 복원)도 만나며 겨우겨우 다다른 행궁지, 약 2시간정도 소요됐다. 현재 1차 발굴단계를 마친 내전의 모습이 쫙 펼쳐져 있었다.

고고학이란 매우 흥미로운 학문임을 일깨우기 위함인지 박현욱 경기문화재단 연구원은 유머러스한 이야기와 함께 역사의 이야기를 덧붙여 안내했다.

"자연을 품은 이곳은 조선군주의 성이자 최후의 보루였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등산코스로만 생각해 주말이면 등산객으로 미어터져 앞사람 배낭만 보고 귀가하지요. 우리문화재가 있다는 사실에는 참 관심이 없어요. 현재 200여점의 문화유산이 쏟아져 나왔고 앞으로도 무궁무진 나올 겁니다. 모두가 산성의 옛이야기들입니다. 이곳은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역사문화의 숲으로서 우리가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미래는 우리에게 달린 셈이죠."

화성박물관대학 북한산성 행궁터를 찾아가다_4
수원화성박물관대학 수강생들이 저 멀리 원효봉을 바라보고 있다

역사 지키기, 우리들 손에 있다!

우리가 가는 길, 아니 300여 년 전 임금이 오르던 길이었지만 우리 팀 말고는 겨우 한 두 사람만이 간간이 지나칠 뿐이었다. 아쉬움은 곧 병자호란을 떠올리게 했다. 김훈 작가는 하루하루 남한산성의 일상을 치열하게 담아냈다. 뼈가 한기에 에는 그들의 일상이 살아나면서 온몸은 차디찬 산그늘에 덮였다. 역사의 교훈이 제대로 박히는 순간이었다.

북한산성과 수원화성은 산성과 읍성차이만 있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행궁이 있고 두 곳 모두 전란을 겪지 않았다. 물론 크기 등 다른 양상이 있지만 문화재에 대한 고민은 똑같다. 
북한행궁이 5개년 발굴조사를 끝내고 건축물까지 복원할 것인지에 대해선 아직 미지수다. 그런 반면 우리는 행궁이 완전히 복원되지는 못했지만 거의 완성이나 진배없다. 이미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국내외 관광객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 더 사랑하고 보호해야하는 이유다.

가을이 가고 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오늘, 화성 한 바퀴 돌아봐야 하겠다. 숙종과 할아버지 영조 임금이 지나친 길을 우리가 돌아봤다고, 정조의 얼이 살아 숨쉬는 수원 팔달산 성신사에서 합장하며 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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