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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말했다 '니가 그지야?'
애들 크고나면 옷을 챙겨 보내는 일이 없을줄 알았는데
2013-11-14 08:48:33최종 업데이트 : 2013-11-14 08:48:33 작성자 : 시민기자   이경

가끔은 우연이 참 좋다. 계획된 삶을 잠시나마 흐트러놓으니까.
2년 동안 밤낮을 가리지않고 타지에서 일을 하던 남편은 예상치 못한 보너스를 받았다. 표정관리가 힘들어진다. 태연한 척 하지만 이내 입가에 미소가 큰웃음되어 주책을 떤다.

"옷 사줄게 나가자~"
말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현관문 앞에 서있다. 백화점 세일은 남의일이고, 격식 따질 결혼식은 일년에 한두번이다. 스타일 신경쓰는 둘째 딸이 버린 작년 여름 티셔츠가 내옷이고, 장보러 가다가 '80% 할인대박'이 걸린 옷가게가 눈에 띄어야 용기한번 내본다. 하지만 세일해도 메이커옷은 어릴적이나 지금이나 너무 비싸다.
뭘 입어도 태가 안나고 차려입고 나갈 자리는 학부모상담이 있는 학교가 전부다. 패션에는 관심없는 삶이라 아쉽지도않고 부족하다고 느끼지도 않고 살았다.

남편이 말했다 '니가 그지야?'_1
보내준 옷가지들을 정리해본다.

어느날 가까운 언니들이 심상치않은 눈빛으로 한마디씩 내뱉는다.
"야~그 청바지 다시는 입고 오지마라, 찢어버리기 전에~" "젊디 젊은 애가 그 따위로,,,"
끝말은 듣지않아도 알 수 있다. 전주가 고향인 몽이엄마 송여사는 말을 참 예쁘게 한다.  딸둘 옷가지와 자신의 옷을 이삿짐 나르듯 가져온다.

"결혼식에 입고갈만한 원피스 챙겨놨어. 언제줄까?" "내가 살이쪄서 안맞아 ~"
얼마전 강아지 콩이를 식구로 맞아드린 김여사는 누가 들을까 조용히 귓속말이다.
나랑 체형이 거의 일치한다. 언니를 만난건 행운이다. 세일해도 감히 엄두도 못낼 옷을 입어보는 호사를 누리게됐다. 누군가 원피스에 맞는 계절에 결혼하면 딱일텐데.

"우리딸이 애를 낳고 옷이 다 작아졌더라~버리긴아깝고 너랑 체형이 맞으니 줄게"
모임에서 가장 빛나는 미스코리아 최여사도 얼마전 보따리 대열에 합류했다. 하늘이 내린 이목구비와 몸매, 게다가 교양을 겸비한 최여사는 가죽재킷을 두벌이나 보내왔다. 앞으로 껌좀 씹고 침좀 뱉어야 할 것 같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없는 낡은 청바지는 내 교복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입고다녔다. 겨울엔 내복위에 입었고 죽을것같은 더위의 여름날만 피하고 늘 입었다. 아마도 가난한 대학시절에 완성된 패션인 것 같다.
유행이 한참 지난 청바지는 아이들 콧물닦고 엉덩이쪽에 스윽~마무리해도 좋다. 길을 걷다가 벤치없으면 보도블럭 모서리에 걸터앉아도 아깝지않다. 바지통은 넓어 타고난 몸매 가리는데 그만이다. 오늘은 뭐입을까 고민없이 언제든 재빨리 입고 나갈 수 있는 교복이라 사진의 90%에 등장한다.
늘 같은옷만 입고 다니는 내가 신경쓰였나보다. 모임의 질적 하향을 고민하신게 분명하다.
어느날부터 언니들은 옷을 보따리로 챙겨다 주셨다.

"니가 그지야?"
대기업 부장인 남편은 창피한줄도 모르고 덥석덥석 받아입는 나에게 소리친다. 그런데 뒷표정은 밝다. 말려도 소용없는줄 알고, 말리고싶지 않은 눈치다.

19살에 만난 친구가 귀농해서 산골짜기에 산다. 어려운시기에 한 두해 차이로 결혼했고, 우린 4년동안 딸들을 하나씩 낳았다. 먼저 결혼한 내가 딸들이 커가면서 옷가지들을 택배로 보내줬다. 네명의 딸들 백일사진, 돌사진, 어릴적 사진속 옷은 거의 똑같다. 너무 헤진옷은 버려도 된다는 쓸데없는 메모를 써가며 청소년시기까지 보냈다.

성격좋은 친구는 "고마워~" 정도가 끝이다. 정말 고맙게도 잘 입히고 잘 키워냈다. 한번도 자존심 상해하지 않았다. 우린 자존심이 무엇인지 모르고 숨가쁘게 살아왔다.
애들도 늘 "이모~잘입을게요~" 투정없이 받아줬다. 친구와 딸들의 심정이 헤아려진다.

언니들이 보내준 옷가지들을 거실에 늘어놓자 우리딸들이 서로 챙겨간다. 이옷 저옷 입어보고 패션쇼를 한다. 딱 맞는옷만 골라가고 나머진 시골 친구에게 보내라고 잔소리한다.
'걱정마라~니들이 말 안해도 보낼라고 했어~'
애들이 크고나면 옷을 챙겨 보내는 일이 없을줄 알았다.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가 옷을 물려입을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남편이 말했다 '니가 그지야?'_2
몽이엄마 송여사와 콩이엄마 김여사

그런데 좀 산다하는 언니들 옷이 가끔은 날 웃게한다. 너무 공주풍이다. 레이스가 화려해서 우리 분위기와는 어색하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스테이크 먹어야할 옷도 있다. 농사짓는 친구한테 보내면 욕이 배달 될 거다. 틈나는 대로 내가 입어야겠다. 큰딸 친구가 놀러왔다가 맞는 옷이 없어 아쉽게 돌아갔다. 살 좀 빼면 입겠구만 잔소리하려다 참았다.

먹고 살만한데도 처량떠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보너스를 핑계로 남편은 옷을 사줄 기분이다. 이럴 때 얼른 못이기는 척 넘어가야한다. 비록 아울렛매장이지만 청바지와 점퍼 하나를 골랐다. 드디어 허리맞는 청바지하나 장만하는구나. 유행 따지지않고 예전것과 비슷한걸 샀다.

다음날 새옷입고 모임에 나갔다. 단박에 눈치채는 언니들. "웬일이니 옷을 다 사고~"
그런데 새옷이라서 그런지 불편하다. 걸음도 신경써서 걸어야하고 앉을때도 몸에 어색하다. 새옷 티가 너무 난다. 누군가 날 볼것같다. 믹스커피 말고 테이크아웃 라떼를 마셔야 하나?
내 옷이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옛날 낡은 청바지 안버리길 잘했다고 속으로 생각하는중이다. 

옷을 사면 뭐하나. 옷에 맞는 신발도 없고, 핸드백도 없고, 보석 악세사리도 없다. 도둑이 집에 와도 가져갈게 없다. 게다가 차려입고 나갈 약속도 없다. 누가보면 참 재미없는 인생이다.
하지만 누구 못지않은 윤택한 삶을 살고 있다. 글도 쓰고, 악기도 연습하고, 매일밤 운동도 한다. 이만하면 되지않나 싶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감당할 수 없으면 갖지않는게 최선이다.

그동안 어색하고 쑥스러워 내밷지못한 말이있다.
"언니들~고마워요~잘 입을게요~" 덧붙이고 싶은 말도 있다.
"언니들~~뭐든 버리기전에 미리 저한테 물어보세요~"
오늘 짬을내서 여름옷가지를 정리했다. 내일은 친구에게 택배를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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