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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동 마을활동가 박호철씨의 꿈은?
2013-10-16 11:00:30최종 업데이트 : 2013-10-16 11:00:30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행궁동 마을활동가 박호철씨의 꿈은?_1
행궁동 마을활동가 박호철씨의 꿈은?_1

'달건(?)'이 인줄 알았다. '달건'이란 그저 할 일없이 동네를 기웃거리며 노는 착한 '건달'을 친한 사람들끼리 뒤집어서 부르는 말이다. 단, 그들이 현재 마땅한 직업은 없어도 절대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에  한에서만 쓰는 우리들만의 은어다. 그가 이 부류에 속하는 줄만 알았던 나만의 착각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호철, 올해 32살, 수원의 원도심 행궁동에서 3년째 살고 있다. 2011년 혼인과 함께 살림살이를 이곳 행궁동 일원인 신풍동에 마련한 후 지금껏 그 흔한 자동차 하나 없이 자전거로 무시로 동네를 배회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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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슈퍼 입구에서 쑥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박호철 씨

지난 9월, 박호철씨의 동네 행궁동은 한 달 동안 차 없이 살기에 도전하는 '생태교통수원 2013'축제로 국내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생태교통마을로 이름을 널리 떨쳤다. 
모두가 무모한 도전이라면서 그 누구도 성공여부를 점칠 수 없는 행사로 간주했지만 9월 30일 마지막 날까지 100만 명이라는 탐방객이 다녀가면서 또다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장안동과 신풍동 일대를 칭하는 행궁동은 34만m²로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의 노른자 땅에 속하는 한가운데 마을이다. 세대는 2천200가구, 인구는 4천300여명이 살고 있고 차량은 1천500여대다. 이들은 한 달 동안 긴급차량을 제외한 모든 화석연료 차량의 통행을 제한하는 축제에 동참하여 성공리에 마쳤다.

인류사에 기록될 만큼 행사 내내 다양한 친환경 이동수단만이 마을을 누비며 걷고 싶은 마을, 살고 싶은 마을로 자리매김했지만 실은, 사업초기 반대 깃발을 들고 헹가래를 치는 주민들로 난항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차츰 변해가는 마을의 변화에 감동한 그들도 동참하면서 이후 순항했다. 모두가 함께해야 성공할 수 있음을 자각한 시민· 행정· 국제기구의 단합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도 한몫했다. 바로 박호철씨를 중심으로 모인 마을활동가들이다. 자발적으로 모인 마을의 청년들이다. 행궁동 골목마다 머리카락 휘날리며 누비고 다녀 처음에는 '달건'인줄 착각했지만 이들은 젊은이들답게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마을의 일을 고민하고 또 실천하는 진정한 마을지킴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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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슈퍼 공간, 15일 오후 찾아간 날, 신풍초등학교 학생들은 마을 다큐 영화를 찍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린 비와 세찬바람으로 을씨년스런 날씨를 연출하던 15일 저녁, 생태교통축제로 유명세를 떨친 '행궁동 문화슈퍼'를 찾았다. 모든 축제의 끝이 그렇듯, 화려한 축제가 막을 내리고 그 이후는 한동안 쓸쓸함을 자아낸다. 이곳 역시, 그간 공간을 메우고 있던 '문화'라는 살림살이가 하나하나 빠져나가고 있었다. 

- 그동안 고생하셨다. 축제기간 문화슈퍼를 다녀간 사람들 대략 어느 정도인가?
"보통 하루에 200여명쯤 찾아왔다. 단체로 투어에 나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인별로 이곳이 궁금하여 들어온 사람들도 꽤 많았다. 도심 안에 이처럼 예쁘고 소박한 공간이 있다는 것에 모두들 즐거워했고, 2층에서 바라보는 빼어난 수원화성 경관에 놀라워했다."

- 문화슈퍼 컨셉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소통'에 방점을 찍은 공간이다. 현대는 '마을은 있으나 이웃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세상이 각박해지면서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만든 것이 마을커뮤니티 공간 즉, 사랑방이다. 오전엔 이웃아주머니들이 이것저것 배우며 수다를 떠는 수다 방이요, 오후엔 청년들이 모여 마을의 일을 논하는 방이다. 낮에는 아이들이 와서 놀기도 하고, 시험기간 중에는 공부방이 되기도 한다."

- 이곳은 원도심이라 평소 청년들을 보지 못했다. 살고 있기는 한가?
"무슨 말씀! 아침이면 일터로 대부분 나가니 낮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의 꿈도 원래는 귀농하여 자연과 더불어 사는 거였다. 그런데 우연히 행궁동 레지던스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수원화성 성곽 길에 반해 버렸다.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유다. 2012년 겨울, 나와 같은 동질의식으로 '자발적 가난'이란 이름하에 마을 청년들이 뭉쳤다. 현재는 23명, 친목을 도모하고, 토의와 토론을 거쳐 청년들의 취업 문제를 고민하고, 나아가 마을의 치안, 육아문제까지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 이곳은 원도심이라 오랫동안 정주한 어르신들이 많을 텐데, 어떻게 접근하나?
"새로운 시각이 필요했다. 기존의 기득권이라 할 수 있는 60대 주민들이 대부분이라 엄청 어려운 문제였으니. 마을의 관심사를 이끌어내면서 동시에 어르신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움직이는 사진관'이다. 현재의 마을을 기록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 가운데 사람들과 만남을 통해 친밀감을 쌓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공동체라는 유대감도 생길 테니 말이다. 현재 문화슈퍼엔 나처럼 주민들과 마을을 잇는 책임자도 있지만 다큐멘터리 작가, 설치미술가, 문화기획자 등 저마다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 속에서 논다. 우리의 모토 '노는 사람들 모두 모여라'처럼. 하하"

- 문화슈퍼에서 나가야 한다고 들었다.
"한시적 공간으로 사용할 뿐이었다. 이곳은 현재 시의 건물로서 그동안 우리에게 건물만 무상으로 제공했다. 축제가 끝났으니 이제 떠나야 한다. 리모델링을 통해 '마을 사료관'으로 들어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 빈집에서 현재의 공간으로 바꾸기까지 주민들과 함께 하면서 행복해했던 공간이었다. 그런데 막상 마을사람들의 웃음이 밴 이곳을 떠나려하니 조금은 서운하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공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다."

행궁동 마을활동가 박호철씨의 꿈은?_4
9월30일 축제 마지막 날 마을 청년들이 무대에 선 모습

생태교통축제가 끝나던 날 30일 저녁, 성공을 자축하는 축제가 마을 어귀에서 있었다. 공감과 조화로 국내외 관광객을 불러들이며 마을의 훈풍을 몰고 온 주민들과 상인들 그리고 사업을 이끈 시(市)관계자들은 얼싸 부둥켜 앉고 늦은 밤까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행복해했다. 그 안에는 박호철 씨도 있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취업이 안돼서, 혹은 사는 것이 우울해서 등등 고민하는 청년들이 있으면 동네 따지지 않고 모두 끼워줄 테니 '행궁('洞'자를 뺀 이유)청년회'로 놀러 오시라"고 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자발적으로 모인다는 행궁 청년회, 이제 그들의 아지트 '행궁동 문화슈퍼'가 사라진다. 주민들이 살고 싶은 동네로 만들기 위해 가교역할 수문장을 자처했던 이들이 이제 의논하고 토론할 보루가 곧 사라진다. 그간 마을 어르신들에게 손자가 되었고, 때론 자식이 되기도 했다. 
이들의 걱정을 또다시 상기시키듯 문화슈퍼를 벗어나는 순간 행궁동 삼거리는 매서운 한기가 몰아쳤다. 난 한동안 서서 모든 사람들이 9월 한 달간 행복해 하면서 '행궁동의 재발견'이라며 흐뭇해하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 

이미 기반시설은 다 갖춰져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이제 박호철씨와 주민들은 힘을 합해 9월의 활기를 이어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선 문화슈퍼처럼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곳들을 그대로 유지하는 시의 혜안이 적극적으로 요구된다. 행궁동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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