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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친구의 친정어머니와 보낸 몇시간
2013-08-20 14:24:23최종 업데이트 : 2013-08-20 14:24:23 작성자 : 시민기자   김형효

애틋한 날을 함께 한 친구가 있는가?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의 공간 5천미터가 넘는 산허리를 며칠을 돌아가야 만날 수 있는 친구다. 지금은 세계가 경계 없이 오간다. 그러나 여전히 한 나라 안에서 며칠을 걸려야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친구들이 있다. 네팔, 히말라야의 산등성이 사람들이다. 

시민기자의 아내는 네팔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기슭 룸자타(rumjatar, 해발1천358미터)출신이고, 또 다른 방향의 솔로와 쿰부 지역사이에 친구인 발라라이의 고향이 있다. 그녀가 살던 솔로쿰부 지역은 3천미터에서 5천미터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고지대다. 
발라 라이는 네팔의 안나푸르나 포스트의 이름난 기자였다. 지금은 경상남도 창원에 시집 와서 살면서 평범한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살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가 한국에 와서 한 달을 넘게 지냈다. 발라 라이가 살고 있는 창원과 주변을 관광하기도 하였지만 거의 대부분 시간을 딸과 친정엄마의 정을 주고받으며 집에서 보냈다고 한다. 
가끔씩 아내와의 통화에서 그녀가 겪는 한국인 시집의 분위기도 전해 들었다. 우리네 문화는 가감 없이 가족간에 갈등도 드러낸다.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면 사돈도 의식하지 않고 거침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 불편한 소리도 들어야했다. 

아내 친구의 친정어머니와 보낸 몇시간_1
아내와 친구 발라라이, 발라라이의 딸, 신랑, 친정어머니와 함께 서울타워 정류장에서

아내 친구의 친정어머니와 보낸 몇시간_2
손녀 딸을 안고 웃는 발라 라이의 친정어머니, 할머니와 손녀의 눈길이 닮았다.

한 번은 발라 라이의 친정어머니가 딸에게 그냥 네팔에 가자고 딸에게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네팔로 돌아간다며 인사를 전하려는 사돈의 인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쉽고 안타까운 소식이다. 아내의 친정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발라 라이의 친정어머니가 떠나기 전날 오후 그녀의 신랑과 친정어머니, 그녀 그리고 아내가 함께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지방에서 살며 외국 출국 경험이 별로 없어 시민기자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네팔에서도 여러 차례 인사를 나눈 바 있는 발라 라이의 어머니를 장모님 대하듯 잘 모시고자 했다. 아내가 해야할 일을 대신한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발라 라이는 둘 다 한국에 시집 와 살고 있지만 친구로서 여행을 함께 해보지도 못했고 가까이 살지 못하니 자주 만나지도 못한다. 시민기자는 이참에 두 사람이 여행도 하고 어머니의 정도 함께 나누며 보낼 수 있는 짧은 시간이지만 보람된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서울역에는 공항철도터미널이 있고 다음날 출국수속을 밟고 곧 출국할 수 있는 철도로 인천공항으로 향할 수 있다. 그런 편의를 이용하고자 서울역 인근에 숙소를 잡았다. 잠시 후 저녁식사를 하고 곧 남산순환버스를 탔다. 
남산3호터널을 통과하고 이태원을 거쳐 장충단공원을 지나 국립공원 그리고 남산으로 들어갔다. 남산N서울타워 정류장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서울의 야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다. 

아내도 친구 발라 라이도 처음이다. 발라 라이의 친정어머니에게 보여주고자 한 내 뜻을 알았는지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한 시간을 남산타워 주변을 걸으며 서울의 야경을 감상했다.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고자 멋진 장소를 잡아 사진도 찍어주었다. 
또 다른 기억을 만들자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아련하고 애틋한 시간의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 두 여성 그리고 친구의 친정어머니, 아내 친구의 친정어머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짧은 시간 동안에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아내 친구의 친정어머니와 보낸 몇시간_3
산유화를 기억하라. 두 사람에게 나이가 들면서도 네팔에서처럼 우정을 잇\ㅈ지 말기를 바라며

아내 친구의 친정어머니와 보낸 몇시간_4
발라 라이의 친정어머니가 출국하기전 네팔전통의상을 입었다. 커다란 화분이 있어 사진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화사한 꽃처럼 밝은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아쉬움을 접고 남산을 걸어서 내려왔다. 소월길에는 산유화라는 김소월 시인의 시비가 서있고, 퇴계 이황 선생의 동상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동상도 서 있었다. 인근에는 다산로, 퇴계로로 이어지는 곳이다. 
'산유화'라는 시비 앞에서 아내와 발라 라이에게 자세를 잡아보라 했다. 훗날 산유화라는 노래나 시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을 때 흰머리 날리며 찾아볼 날도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곧 다른 버스를 타고 시청과 광화문,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으로 돌아왔다. 

모자란 시간이었고 찰라처럼 흐른 시간이었지만, 매우 깊고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냈고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서울역공항터미널에서 작별인사를 나눴다. 
지금 발라 라이의 어머니는 네팔에 계신다. 어젯밤 아내와 함께 통화를 했고 창원으로 돌아간 아내의 친구와도 통화를 했다. 가까이에 살면서도 히말의 계곡보다 먼 유선의 추억만 만들어가는 아내와 친구가 모처럼 만난 시간 길 안내를 할 수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내도 친구도 좋은 기억으로 일상을 살아내주기를 기대해본다. 

작별인사의 시간 눈물이 맺히는 친구의 친정어머니를 안아주었다. 아내도 나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친정어머니가 부디 안녕하시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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