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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성시’ 현장서 본 대만, 우리와 닮았다!
2013-08-04 01:34:23최종 업데이트 : 2013-08-04 01:34:23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저명한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이는, 지나간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뜻일 게다. 

폭염으로 지독했던 7월 말 아름다운 섬나라 대만에 다녀왔다. 우리나라에서 2시간이면 닿는 가까운 나라이며 관광자원이 풍부한 나라라는 매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바로 '역사성'이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근현대사의 슬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외환보유국 5위권 안에 들 정도로 탄탄한 경제를 쌓은 그 원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4박5일 짧은 일정이지만 대북에서 대남까지 역사적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것은 곧 나의 거시적 안목을 키워줄 것이란 생각으로. 

대만섬에 첫발을 디딘 네덜란드(동인도 회사) 식민시기에 이어 정성공(明) 시대인 17세기 시기, 청조시대에 이어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시기, 그리고 다시 대만으로 독립하기까지, 중국문화와 밀접하지만 공간적으로 완전한 독립성을 갖기까지의 과정을 남아있는 사적지를 통해 개략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했다.

"타이베이는 일본이 세운 도시다. 반세기를 통치하면서 그들의 사회· 문화가 구시가지 건축물 곳곳에 새겨졌다. 소국이지만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일찍이 외래문화가 들어옴으로서 고유문화와 함께 다양한 문화가 살아 숨 쉰다. 중국 본토는 문화대혁명 때 거의 단절됐지만 이곳은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온다. 대만에 중국의 옛 전통문화가 남아있는 연유다. 공자묘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대만 가이드 말 중에서

영화 '비정성시'를 통해 본 대만

'비정성시' 현장서 본 대만, 우리와 닮았다!_1
지우펀 문화 옛거리, 영화 '비정성시'와 우리나라 드라마 '온에어', 일본만화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으로 알려지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중국 광동성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허우샤우시엔 감독의 영화 '비정성시'(1989)는 영어로 'A city of sadness'다. 해석 그대로 격동의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매우 슬픈 서사극이다. 
국.공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1949년 12월 대만으로 정부를 옮긴 국민당 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1947년, 대만 현대사의 큰 비극이라 할 수 있는 2월28일 사건이 주 배경이다. 45년 광복 후 대륙 출신들과 대만인의 불신과 불만이 폭증하던 시대적 이야기를 한 가족(4형제)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감독 특유의 서정성으로 빚어진 영화의 배경이 타이베이 '지우펀(九份)'이다. 과거 아홉 집만이 살아 물건을 거래할 때 항상 아홉 집의 것을 구입할 만큼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1920~30년 아시아 최대의 금광도시로 이름을 날리면서 이른바 '골드러시'로 번성가도를 달린다. 그렇지만 채광산업의 몰락과 함께 곧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갔다. 

이곳을 다시 관광거리로 살린 사람이 바로 허우샤우시엔이다. 돌계단, 경사도가 70도 정도인 산 비탈 마을에 있는 영화관, 구불구불한 골목길, 특색 있는 상점 등 특유의 옛 정취로 관광객의 마음을 한번에 붙잡는다. 비정성시의 가슴 헤집는 슬픔을 이내 잊게 만들 정도로. 
해안가 긴 계단 양쪽, 미려한 상점들이 아련하게 아름답다. 지난한 역사를 똑똑히 가슴에 새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화사상'의 자존감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대만은 국토의 반 이상이 산지다. 면적이 우리나라 영남권만한 작은 나라이고 인구는 약 2천300여명 정도이다. 따라서 면적에 비해 인구밀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그렇지만 광복 후 외국자본도입으로 빠른 경제발전을 이뤄 2000년대 이미 GDP 2만 불이 넘어설 정도로 경제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나라다. 

도교와 불교가 오랜 세월 동행하면서 현재는 그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 시내는 물론 내륙지역에 수많은 도교사당들이 4천개에 이른다. 전 인구의 97%가 한족이다. 
우리나라와는 1992년 중국과의 수교로 단절됐지만 이전엔 '형제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매우 밀접했다. 중국대륙에서 전개된 항일독립운동 당시 국민정부가 적잖이 도움을 주었으니. 한때 양국 간 단교로 비행기가 오가지 못했지만 지금은 직항로로 서로 왕래하고 있다. 

'비정성시' 현장서 본 대만, 우리와 닮았다!_4
좌, 장개석 총통과 손미령 여사가 살았던 '사림관저' 입구부터 격조있는 정원은 관람객의 눈길을 사정없이 놀라게 한다. 우, 시계방향으로 타이난에 있는 최초의 공자묘, 도교사당 행천궁, 네덜란드인들이 행정센터로 사용한 건조물 적감루, 내전과 항일운동 당시 전사한 군인과 열사의 영령을 모신 곳 '충렬사' 위병교대식이 볼거리다

1624년부터 38년 동안 네덜란드인이 타이완 남부를 점령하고, 명나라가 청나라로 바뀌자 명을 부활시키겠다는 야망으로 본거지를 대만으로 옮긴 '정성공 시대', 그리고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할양되고 1945년 독립하기까지 대만은 50여 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다. 이어 1949년 장개석 국민당이 모택동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면서 대만으로 건너와 본성인(청나라 시대 이전에 들어온 사람의 후예들을 지칭)들과 함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개석과 그의 부인 손미령 여사에 대한 대만사람들의 역사적 평가요? 극과 극을 달립니다. 그러니 우리가 장개석 총통의 '중정기념당'과 삼민주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애쓴 손문 선생의 '국부 기념관'은 한번 가야겠지요. 물론 5천년 중국 역사의 보고인 '고궁박물관'과 '사림관저'도 가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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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구중정기념당인 민주기념당. 우, 손문을 기리는 '국부기념관'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행정중심지였다는 대북(타이베이)은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그곳은 장개석과 손문의 위업을 기리는 가운데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으로 똘똘 뭉쳐 '하나의 국가(중국+대만)'를 표방하고 있었다.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국민들의 주체성 '중화민국'에 있었다.

부침의 역사, 우리와 같다

17세기부터 한족이 이주하기 시작하여 18세기 초부터 무역항으로 번창한 타이베이 항구 지롱시에 남아있는 성벽이나 네덜란드 군의 요새로 알려진 '안평고보', 청나라 말 해안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바닷가에 세운 '억재금성'....자취가 오롯이 남아있든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든지 간에 역사적 상징성을 충분히 보여준다. 당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흙을 밟고 성벽을 더듬으며 군사들의 함성에 귀 기울인다. 우리나라 또한 시대적 배경이 일치한 까닭으로 허투루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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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타이난에 있는 '억재금성' 벽과 해자를 갖춘 타이완 최초의 서양식 요새다. 우, 타이베이에 있는 항구도시 지롱에 있는 19세기 성벽, 꽤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프랑스와의 관계도 그렇고, 일본과의 관계도 그렇고...모두가 우리의 역사와 맞물려있다.
동북아시아가 강대국의 각축장으로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 대만과 우리나라는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에 걸려들고 말았다. 먼저 조선을 장악하고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잡기위해선 반듯이 청을 격파해야 하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우리나라를 36년간, 대만을 50년간 지배했다. 

다른 듯 같은 대만, 함께 걸어가야

대만은 분지형태로 사발그릇 모양이다. 따라서 태풍에 강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타이베이 도심 담수하강(탄수이허)에 높은 담을 쌓았다. 신시가지의 동력이 여기서 나왔다. 도심의 사람들은 강의 물결처럼 잔잔히 생활한다. 거리는 조용하고 매우 깨끗하다. 상가나 시장이나 호객행위는 볼 수 없고 푸근한 인심만이 느껴진다. 친절도 또한 높다.

용산사나 행천궁이나 도교사원을 찾는 참배객이 차분하게 기원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다. 그들의 여유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듯 아무 때나 찾아가 신심을 보인다. 안빈낙도의 공간으로서 심신을 치료하는 사람들로 가는 곳마다 향불의 바다를 이룬다.

우리가 알고 있던 불안전한 도시 '비정성시'의 대만이 아니었음을... 대만 현지에서 깨닫는다. 오늘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지금 이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여론도 있지만, 여전히 중국본토로 입성하기만을 꿈꾸는 대만인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을 현지에서 철저히 체감할 수 있었다.

여전히 대만의 현실은 중국과의 관계 등으로 국제무대에 자유롭게 설수 없는 어려움이 있고, 국내문제 또한 국민당과 민진당 등 정치적 변수로 인해 미래의 방향이 모호하다. 
우리나라 역시 국내 정치나 국제적 관계 등을 고려할 때 대만의 고민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럴 때일수록 양국 간 긴밀한 사이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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