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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문의 위상, 도성 숭례문과 동급이었다
18일, 화성박물관 팔달문 해체보수 준공기념 학술대회 열려
2013-07-19 13:45:56최종 업데이트 : 2013-07-19 13:45:56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팔달문의 위상, 도성 숭례문과 동급이었다_4
지난 5월 팔달문 해체보수를 끝내고 열린 중건 준공식

수원화성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성곽이다. 
당대 최첨단 건축기술이 총 집약된 성(城)으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성곽건축의 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화성의 중심 팔달문(보물402호)은 북쪽 장안문과 함께 문루의 백미를 자랑하는 건축물이다. 당대 목조건축기술 최고의 장인들 덕분이다. 그리고 조선 초기 도성 숭례문을 근간으로 삼고 한층 보완한 기술을 보탬으로서 완벽한 건축물로 탄생할 수 있었다.

그 근거를 제시하는 학술대회가 지난 18일, '팔달문에 나타난 18세기 목조건축기술의 특징'이란 주제로 수원화성박물관에서 개최됐다. 
지난 5월 팔달문 해체보수를 끝내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문화유산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팔달문의 구조나 건축기술을 꼼꼼히 살펴봄으로서 서울도성의 위상과 동급이었음을 알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객석은 물론 통로까지 밀려든 관객들은 팔달문과 숭례문 등 도성 건축과 사찰 건축물을 통해 전달되는 목조건축물에 대한 이해를 위해 4시간여 동안 토론자와 발표자들과 함께하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용어도 어렵고, 범위도 광대한 목조건축! 시민기자의 관점으로 기록해봤다.

 
팔달문의 위상, 도성 숭례문과 동급이었다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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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울 도성의 문을 본뜬 것일까

먼저 숭례문. 태조 7년(1398)에 완성된 '숭례문'은 서울 한양 4대문 가운데 남쪽 문에 해당한다. 도성으로 드나드는 큰 성문으로서 대한민국 위상을 보여주는 국보1호이기도 하다. 
600여 년 동안 왜란과 호란의 아픔은 물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포화도 비껴가며 우리역사의 자존감을 지켜온 자랑스러운 문화재다. 그러나 2008년 2월,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으로 화마에 의해 완전 소실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5년 2개월이 지난 후 원형 그대로의 늠름한 모습을 드러냈다.

수원화성 팔달문은 1794년 2월 북문의 장안문과 함께 터 닦기 공사가 시작된 후 이듬해 9월, 각각 완성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중심 문이다. 
그러나 20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구조적 안전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난 2010년 6월 원형유지 및 문화재보존을 위한 해체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팔달문 역시 지난 5월, 2년 10개월 만에 웅장한 모습으로 시민들 앞에 다시섰다.

수원의 남문인 팔달문은 서울도성 숭례문과 창덕궁 돈화문, 창경궁 홍화문 등과 함께 '중층 건축'물이다. 즉, 지붕이 상하로 2개라는 점과 실내공간이 상하 둘로 나눠져 있어서 계단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수려함과 화려함, 더불어 군사적 기능까지 겸비한 건축물로서 지어진 팔달문...수원화성은 일반적인 읍성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서울 도성 급으로 설계된 것일까.

옛 화산(현재 융· 건릉 자리)읍에서 지금의 수원으로 신도시 화성을 축성한 배경에는 조선 22대왕 정조의 꿈이 있었다. 상왕으로서 수원에 자리한 후 서울 도성과 함께 조선을 이끌고자 했던 정조는 관리의 직급을 종3품에서 정2품으로 승격시키는 등 모든 면에서 서울 버금가는 위상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니 분명 읍성이지만 성격이 전혀 다른 도성의 위치로서 특수한 성격으로 축성된 성이었던 것이다.

목조건축물에서 근거를 찾다

팔달문은 조선시대 대규모 건축을 대표하는 공포형식인 다포식 건축물이자 중층 건축양식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중층 건물들은 대부분 사찰과 도성 건축이다. 
'18세기 정조대 화성 팔달문 구조 분석 연구'란 주제로 나선 류성룡(계명대 전통건축학부 교수) 발표자는 중층 문루 건축으로서 구조상 심고주 형식이고, 정면 5간 도성문인 숭례문과 흥인지문과 같다고 했다. 여타의 구조도 유사하고 공포의 출목(몇 개의 첨차가 교차되는지 구별하는 용어로서 그 건물의 크기나 위계를 알 수 있다)수나 기둥의 위치 등 배치면에서도 닮았다고 했다. 계단만 살펴보더라도 한국건축의 디테일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팔달문의 위상, 도성 숭례문과 동급이었다_2
팔달문의 위상, 도성 숭례문과 동급이었다_2

역사건축기술연구소 이경미 소장은 '팔달문의 장인(匠人)과 건축기술'이란 발표에서 숭례문과 동일한 구조방식으로 짓기 위해 서울을 위시해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 수준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노임까지 주는 모병제로 인해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탄생할 수 있었다고 했다. 물론 과학기술의 발달도 한몫했지만 강원도 김화에서 온 승려 굉흡이 목수로 활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목조건축 기술(다포식 기술전승)이 사찰에서 쭉 이어져 왔었기에 가능했다고.
장안문 장인들 분야별 명단을 보면 대부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주였고, 팔달문 장인들은 그보다 훨씬 젊은 층들이라 화성축성 이후 건릉 산릉 조성, 인정전 영건 등 이들의 최고기술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제3주제 '팔달문과 숭례문의 건축구조 특성비교'를 주제로 들고 나온 이왕기(목원대 건축학부) 교수는 다포식 공포의 시대별 특징과 건축 구성요소 등을 보여주며 팔달문과 숭례문의 비교에 나섰다. 규모의 유사성과 차별성, 장식성의 변화, 공정의 합리화, 재료의 규격화, 도구의 개발 등과 함께 사회상까지도 반영한 팔달문은 도성 숭례문의 위상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면서 안정적인 모양새로 축성됐다고 밝혔다.

팔달문의 위상, 도성 숭례문과 동급이었다_3
팔달문의 위상, 도성 숭례문과 동급이었다_3

약간의 아쉬움...그러나 더 큰 자긍심 남아

이어 토론자로 나선 노현균(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정연상(안동대학교 교수), 조상순(문화재청)씨 등 3인과 발제자들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그리 만족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대부분 추후,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다시 발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장인들을 다루었다는 점, 도표와 도면· 실 사진을 통해 목조건축 구조물에 대해 일반인들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를 마련하고 그럼으로써 팔달문에 대한 위상을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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