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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근대문화유산 수인선을 지켜내자
지역문화예술교류 ‘추억은 방울방울’ 프로젝트 알차다
2013-06-19 13:40:57최종 업데이트 : 2013-06-19 13:40:57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길'이란 인류역사의 태동과 함께 시작됐다. 그 길은 물자의 운송로이기도 했고, 때론 군사 이동로, 혹은 상호 정보교환 및 재화의 유통을 발달시키는 문명사적 길이기도 했다. 이처럼 길은 오랜 기간 삶과 소통의 통로였다.

역사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삶의 공간을 넓히는 데에 일조한 길은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한다. 그 길이 '자발적으로 형성된 길이냐 혹은, 타의적으로 조성된 길이냐'의 문제에 따라 우리의 사고는 확 달라진다. 

현재 '옛길'이라고 부르는 길은 조선시대 한양과 지방로를 연결하는 6대로 혹은 10대로 체계로 확립된 도로망이었다. 이 길은 개화기 서양식 도로제도 수용을 통해 개보수가 진행됐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들어와선 국도와 군도 도로마다 폭을 확장하는 등 철도 신설과 함께 대대적인 치도사업으로 추진됐다. 이때 닦아진 길은 모두가 식민지 침탈정책으로 신설· 보수를 통해 조성된 타의적인 길이었다.

18일, 수원문화재단(대표이사 라수흥)이 주최하고 수원문화원(원장 염상덕)이 진행하는 '추억은 방울 방울-지역문화예술교류' 프로젝트에 의해 익산문화재단과 문화원 사람들이 수원시를 찾았다. 
익산은 군산선이 존재했고, 수원은 수여선과 수인선이 존재했다. 두 도시는 일제강점기시절 수탈의 아픈 역사가 남아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에 현장탐방을 통해 역사를 공유하고 추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상호교류 원칙에 따라 수원문화재단과 수원문화원은 지난 4일, 군산역 등 근대문화유산을 돌아보고 왔다. 

수원의 근대문화유산 수인선을 지켜내자_1
소래철도역사관 내에 재현된 수인선협궤열차

수인선의 탄생

조선의 곡창지대 호남평야로 말미암아 비옥한 토지와 귀한 쌀을 축척한 도시 군산은 일본인들이 혹할만 도시였다. 그들이 격자형 도시로 도로망을 발전시키고 항구와 함께 내륙철도를 부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세기 말 개항시킨 군산항은 당시 생산량의 60%에 해당하는 미곡이 일본으로 송출됐다. 쌀 수급을 위한 도시풍경은 철도 및 미곡창고, 은행 등 근대문화유산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익산에서 출발해 군산으로 이어지던 군산선이 쌀 수탈의 철로였다면, 수인선은 곡물과 해산물, 소금 등을 인천으로 운송하는 역할이었다. 식민지 수탈을 위해 내륙과 항구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이었다는 점에서 두 노선의 탄생은 거의 흡사하다.

일명 '꼬마열차'라고 불리던 수인선 협궤열차는 1937년 개통되어 1995년까지 수원과 인천을 잇는 교통수단으로 모두 17개의 정거장(임시정류장 포함)이 있었다.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으로 기록되어있지만 실제론 2시간이 넘었다. 
그러나 1977년 국도가 확장되고 애초의 기능을 잃으면서 운명의 기로에 섰다.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의 통학노선으로, 해산물을 인근 장터로 옮겨 나르는 등 제한적인 역할만을 간간이 수행하다 결국 1995년 폐선 되고 말았다. 

서민들의 향수와 낭만의 장소

'깜장 고무신 신고/ 냉이꽃 하얀 들을// 협궤열차 간다/ 까까중 그 애 간다// 그리워/ 어린 봄날을/ 참참 불며불며// 그 언제 개울에 놓친/ 아른아른 고무신 코// 눈물 싣고 간다/ 꿈꾸듯이 西으로 西으로// 다시는/ 손잡을 수 없는/ 오, 나의 소년 간다'- 정수자<봄, 협궤열차>

'낡은 사진, 녹슨 철길, 건널목 표지판···. 옛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소품들이다. 여기에 민폐가 되지 않을 착한 눈이라도 내려준다면 친구들과 함께 이런 얘기를 안주삼아 따끈한 어묵 한 사발과 소주를 나누는 게 제격일 것이다. 추억은 늙지도 않는가. 어스름 저녁 기적 소리 울리며 세류 삼각선을 돌아 수원역으로 되돌아가던 까만 기관차와 기차 바퀴에 납작하게 눌려 만들던 대못칼, 그리고 뒤뚱대며 느릿느릿 인천으로 향하던 두 량짜리 동차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조성면 <시가 된 추억열차, 수인선>

수원의 근대문화유산 수인선을 지켜내자_2
수원역을 떠난 수인선과 수여선이 만나는 지점 '세류 삼각점' 세류공원에 전시된 수인선 모형

 '수인선'에 대한 글들이다. 이처럼 열차 혹은 간이역은 늘 문학작품의 단골메뉴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들처럼 열차는 추억이요 낭만의 장소로 비춰질 수도 있고, 누구에겐 눈물의 장소로 기억될 수도 있다. 
혹은 추억· 낭만 운운에 앞서 식민지 수탈의 근대문화유산의 흔적으로서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며 탄생배경만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두가 기억해야하고 간직해야할 오래된 역사이다.

질주하는 노선

수인선의 정거장은 총 17개, 현재 남아있는 자취를 찾아 나섰다.
수인선과 수여선이 만나는 세류 삼각점 세류공원, 선로와 노반 일부가 남아 있는 고색동과 오목동, 화산터널, 현재 민가로 사용하고 있는 화성시 매송면 소재 어천역사, 화성시와 안산시가 갈리는 빈정철교,그리고, 수인선 잔선이 가장 길게 잘 보존된 안산 고잔역과 인천 소래철교 등 인천까지 가는 노선 길 따라잡기다.

수인선 안내에 나서 조성면 교수는 수원토박이로서 세류초등학교 출신이다. 그러니 세류역은 그의 놀이터이자 오롯이 기억하는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수인선과 수여선은 지방민들의 보따리 인생과 맥을 함께 합니다. 그들은 철도교통을 이용해 생필품을 사오고 농수산물을 팔면서 자식들을 공부시켰고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죠. 이제는 고향의 향수이자 낭만이요 추억으로 남았지요." 

수원의 근대문화유산 수인선을 지켜내자_3
위는 증기기관차, 아래는 수인선 철로가 가장 길게 남아있는 고잔역사

1930년대 개통한 수여선과 그 뒤 7년 후 개통한 수인선이 교차하는 곳 세류 삼각선 지역엔 다소 옹색한 한 량짜리 꼬마기차모형이 재현되어 있다. 역사적 상징성만 보여줬다는 말에 위로를 삼는다.

고색역, 수인선 철길, 화산터널 등  설명이 이어질 무렵 도착한 어천역사! 그 건물은 60~70년 유행하던 건축물로 보인다.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당시 역사와 화장실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현재 주인은 누구인지 모르나 누군가 세를 얻어 살고 있다고 했다. 
"하루 속히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호되어야 하는데 안타깝네요. 저렇게 방치되어 있으니..."
"여러분! 지붕위에 블록이며 빨간 벽돌 보이시지요. 직접 보시고 초라함에 실망하실지 몰라도 저는 저렇게나마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지 모릅니다."

아쉬움을 달래준 곳은 화성시와 안산시의 경계에 있으면서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는 빈정철교다. 아침부터 내린 비로 철교 밑은 제법 거센 물결이 흘러가고 있었다. 철교위에 올랐다. 
도도히 흘러가는 물살을 보니 약간 어질어질했지만 내가 서 있는 철로로 두 량짜리 꼬마열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떠올리니 기분은 둥실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녹슨 철로이지만 마냥 고맙기만 해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보았다. 저 멀리 달캉달캉 꼬마열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오래전 그곳까지 물이 들어왔다는 야목리 빈정물가에서 근대 역사를 생각해본 후 다시 다음 목적지 고잔역사와 소래 철도역사관, 소래철도를 향해 달려갔다. 
수인선 잔선이 가장 잘 남아있다는 고잔역은 잘 꾸며진 놀이동산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탐방지 소래철도 역사관과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서 다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소래철교 등을 돌아보며 수인선의 흔적 찾기를 끝마쳤다.

수원의 근대문화유산 수인선을 지켜내자_4
위는 현재 민가로 사용 중인 어천역사이고 아래는 철교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빈정철교

'기억된 것과 기억될 것이 만나는 곳, 여기'
'낯설음과 소통 묻었던 기억의 탈출'
1960년대 늘 안전만을 생각하며 협궤열차를 운전했다는 장인상 기관사님! 그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는 고잔역 선로위에서 옛 일을 추억하는 말들을 끄집어 올리며 참가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당시 역주변의 풍경까지도 세세히 설명해 나갔다.

또다시 추억 속으로

'뜻하지 않은 사고로 꼬마열차가 뒤집어졌다. 동시에 화재로 기관사도 졸도한 가운데 숯 껌둥이가 된 승객들은 모두 힘을 합해 기관사를 꺼내고 기차도 바로세우는 등 화재까지도 진압했다.'
'당시 통표라고 하는 허가증을 보여주어야만 다음 코스운행이 가능했다.'
'홍수로 인해 기차가 떠내려 간적이 있었다.'
'1톤 트럭과 꼬마열차가 충돌했을때 열차가 넘어갔다.'
'혀기· 미카· 파시 증기기관차 중에서 대표적인 기차는 혀기였다.'

옛 철길은 플레이보이들의 작업공간이었다는 말과 함께 역사 속 한 장면으로 남은 '수인선'.
익산문화재단과 익산문화원을 맞이한 수원문화원 그리고 수원문화재단 사람들은 추억 속 장소들과 대면하면서 서로 밝은 미래를 약속했다. 
과거는 현재를, 현재는 미래를 밝히는 거울이듯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서로 인식하며 수원화성 일대와 화성행궁을 돌아보며 문화교류일정을 마쳤다. 그들은 '수원역사 길'에 매료됐는지 피곤한 기색도 없이 만족한 얼굴빛을 한 채 각자의 생활 속으로 돌아갔다.

* 알찬 프로그램으로 좋은 추억 남게 해준 수원문화재단과 수원문화원, 그리고 익산문화재단과 익산문화원 관계자들께 감사인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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