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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할머니의 손맛!
2013-06-16 15:40:12최종 업데이트 : 2013-06-16 15:40:12 작성자 : 시민기자   김소라

할머니댁에 들어서자마자, 집안 그득 고소한 냄새가 진동이다.
"할머니, 인절미 떡 했어?"
"그럼... 우리 소라가 제일 좋아하는 떡 했지!"
"우와! 할머니 콩가루 많이 묻혀서 줘."
다른 떡보다 유난히 인절미를 좋아한다. 하얀 찹쌀밥을 다라이에 놓고 방망이로 치댄 다음 뜨끈뜨끈 할 때 콩고물을 골고루 묻혀 낸 인절미는 언제 먹어도 흐뭇하다. 특히 친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인절미는 남달랐다. 

그리운 할머니의 손맛! _2
그리운 할머니의 손맛! _2
 
매년 여름방학, 겨울방학마다 할머니 집에서 몇 주씩 노는 것이 초등학교 시절 의례적인 일이었다. 서울에서 경기도 화성 조암까지... 어릴 적엔 아빠가 데려다 주셨고 4학년쯤부터는 혼자 동생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갔던 기억도 난다. 

천호동 버스터미널에서 수원가는 버스를 타고 수원 터미널에서 내린다. 그리고 다시 수원 터미널에서 화성 조암까지 가는 버스를 갈아탄다. 
아직도 허름하고 지린내가 나던 수원 옛날 터미널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다. 
마지막으로 조암 터미널에서 내리면 다시 우정면 조암리까지 들어가는 시골 버스를 타야 한다. 운 좋으면 한 시간에 한 대 있을까 말까한 버스를 타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걸어서 간다. 

초등학생 시절 나의 걸음으로 40분 정도 걸렸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차로 지나면 5분도 안 걸릴 거리다. 어느 땐 할아버지가 마중 나오셔서 자전거를 타고 같이 가기도 했다. 
6학년쯤 되어선 택시를 타고 갈 줄도 알았다. 지금은 길이 좋아져서 서울에서 조암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이지만, 예전에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갈 땐 세 시간도 넘게 걸렸다. 

요즘 아이들은 방학이면 학원이다, 체험학습이다 더욱 바쁘다지만 나 어릴 적만 해도 시간에 시간에 쫓기는 것 없이 그냥 자유로웠다. 한 달씩 아무 것도 안 하고, 시골에서 온종일 놀아도 죄책감 갖지 않았던 시절이다.

할머니는 손주들이 오면 이것 저것 먹을 것을 해대기 바쁘셨다. 특히 인절미는 내가 좋아한다고 하여 매번 갈 적마다 만들어주셨다. 동생들은 떡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나는 앉았다 하면 떡에서 손을 놓지 못할 정도로 계속 입에 집어 넣어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다시 한번 그 인절미를 맛보아야 할텐데... 

또 한가지 음식은 엿이었다. 엿기름물을 끓여서 졸인 후 땅콩같은 것을 넣어서 만든 엿이다. 보통 다른 데서 파는 엿은 딱딱한데 할머니 엿은 참으로 부드럽고 살살 녹았다. 엿을 밥그릇에 퍼서 숟가락으로 먹기도 했다. 따끈할 때 바로 만든 엿을 젓가락으로 살살 돌려서 먹으면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할머니가 엿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보지는 않았는데, 가마솥에서 계속 오랫동안 주걱으로 젓고 계셨던 것은 기억난다. 방학이 되면 먹을 수 있었던 할머니의 엿은 그 시절 달콤한 추억이 되었다.

지금 팔순이 넘으셨으니, 아마 나의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는 50대의 젊은 할머니셨다. 그래도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쉼없이 농사 일을 하고, 놀러 온 손주 녀석들을 위해서 계속 먹을 것을 해댔다. 

뜨거운 여름날, 나름 할머니를 돕겠다고 고추밭에 갔다.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는데 처음엔 똑똑 하나씩 가지에서 고추를 따는 재미가 쏠쏠했다. 풋풋하게 익은 고추를 톡 하니 따서 바구니에 채우는 것으로 동생들과 내기도 하고. 
그러다가 슬슬 날이 더워지고 손이 에리면서 힘들어질 무렵 겨우 한 고랑도 채 못 따고 바구니를 버리고 놀러 나갔다. 하루종일 놀다가 해가 기울 무렵 집에 들어가보면, 할머니는 그제서야 들어오셨다. 온종일 밭에서 고추따고, 잡초도 뽑고, 콩도 따고 일을 하신 모습이 고단하셨을텐데, 어린 나이엔 별 생각이 없었나보다. "할머니 배고파, 밥줘!" 하면서 건방지게 이야기했으니... 

지금도 살아계신 할머니는 손녀딸인 내가 시골에 가면 이것 저것 챙겨주지 못하여 안달이시다. 작년 가을 오랜만에 갔더니 작은 호박하나, 늙은 오이 몇 개, 상추 한 봉다리, 고추한 움큼, 직접 담근 장아찌까지 조물조물 비닐 봉지에 넣어서 담아주셨다. 여전히 할머니에게는 자식들 퍼 주는 것이 낙이다. 

정신대 끌려간다는 소문을 듣고 서둘러 열여섯에 시집을 와서 7남매 낳고 농사짓고 사셨다. 남편 사랑, 시부모님 사랑 전혀 받지도 못한 채 매일매일 노동하면서 힘겹게 살아오셨다. 팔십 평생을... 이제는 일 안 하셔도 편히 지내실 만한 시간과 돈도 있으신데 아직까지 조그만 밭 일구시면서 자식들 오면 뭐 하나라도 챙겨 주시려고 애쓴다.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인생도 있을 터인데 할머니는 오로지 자식뿐이다. 예전에는 참으로 부인하고 싶은 할머니와 같은 삶이 요즘에는 숭고하게 느껴지기만 하다.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한 삶이 아닌 있는 그대로 자족하면서 하루 하루 충실히 사는 것 말이다. 

나도 진짜 할머니가 되면, 우리 할머니가 나에게 해 주신 것처럼 손주들에게 인절미떡과 쌀엿을 해 줄 수 있을까? 찾아오는 자식들 손에 비닐 봉지 그득히 사랑을 담아 무언가를 채워줄 수 있을까? 보고 싶다... 우리 할머니.

그리운 할머니의 손맛! _1
그리운 할머니의 손맛! 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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