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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역 환승센터에 전시된 '근대 수원 100년' 사진전
사진으로 살펴본 한 시대의 정책 그리고 문화
2023-11-20 09:37:22최종 업데이트 : 2023-11-20 09:37:21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수원역 환승센터 전경

수원역 환승센터 전경


수원역 환승센터에는 버스 승객들을 위한 난방 시설이 설치된 대기실 A, B, C 등 3개동이 있다. B동 대기실에는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연대별 '근대수원 100년'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수원의 역사(驛舍)와 우시장, 팔달문, 화홍문 등의 사진은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에게 수원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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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진 전시는 '근대 수원 100년' 역사로 벽면에 공간을 만들어 부착 언제고 볼수있게 했다.


수원에는 기름진 들판이 펼쳐져있고, 점차 농수산물 집산지가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수원을 관통하는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었고, 수원에 새 역사(驛舍)가 생기며 1905년 1월 1일부터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수원역은 120여 년의 긴 역사와 함께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로 발달해왔듯 역사(驛舍)도 수차에 걸쳐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수원의 모습
1928년 수원화성의 관광 활성화를 위해 기존 역사를 철거하고 조선의 전통 한옥인 기와집으로 새 역사를 지어, 30여 년간 업무를 보던 역사가 소실된 후 1961년 현대식 건물로 새 역사를 지었다. 그 후 산업화와 함께 수원시가 개발되면서 인구 증가와 교통의 발달로 외지인의 왕래가 늘어나면서 역사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28년 준공 1950년대까지의 수원역사 모습

1928년 준공 1950년대까지의 수원역사 모습

 

2003년 2월 대규모 쇼핑공간(AK플라자)을 갖춘 현대식 민자 역사로 거듭난 역사(驛舍)가 현재의 수원역이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수원역에는 KTX를 비롯한 모든 열차가 정차한다. 수도권 전철 1호선과 분당선의 환승역이기도 하다. 2017년 수원역 환승센터가 준공되면서 명실상부한 수도권의 교통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수원에 우시장은 전국 3대 우시장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漢陽) 도성 안에는 도축을 금지했다. 그러다 보니 성(城) 안에는 우시장이 서지를 안 했다. 그래서 서울의 남쪽인 수원에 우시장이 서게 됐다.
 

일제강점기 수원 우시장

일제강점기 수원 우시장

 

정조가 행궁과 성곽을 축조하면서 자재 운반을 위해 소를 동원하여 공사를 마치고, 그 소를 농민들에 나눠주면서 수원에 가장 큰 우시장이 생겼다. 1920년대에는 수원 우시장에 출하된 소가 무려 2만 여두로 함경도 명천과 길주 등과 함께 3대 우시장으로 꼽혔다. 오늘날까지 수원 갈비가 명성을 떨치는 데는 바로 우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로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졌다. 산과 들을 가로질러 도로를 개설, 해방 후에도 새로 만든 길이라는 뜻으로 도로를 신작로(新作路)라고 했다.
 

1929년 수원읍내 1등 도로

1929년 수원읍내 1등 도로


1950년~1960년대 수원시의 이모저모

1960년대 수원시 인구는 4만여 명이었다. 수원시청은 지금의 종로 후생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6.25 때 폭격으로 파손되었다. 휴전 후 교동에 있는 수원법원과 검찰청(1952년~1956년)이 쓰던 건물(일제 때 중앙무진회사)을 임시청사로 사용하다가 1964년 교동 74~1 부지를 매입(대지 3,276m 2, 건평 514,2m2, 연면적 984,54 m2) 새 청사를 신축(1966,7,26 준공) 1987년 중반까지 20여 년간 수원시 청사로 사용해 오다가 현재의 새 청사를 지어 이전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수원시청사 모습( 현 가족여성회관)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수원시청사 모습(현 가족여성회관)

1950년 북조선의 6.25 남침 전쟁은 100여만 명의 인명 피해를 냈고 국토가 폐허 되었다. 두번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발생한 수원시 세류동 난민촌 모습

1950년 6,25 전쟁으로 발생한 수원시 세류동 난민촌 모습

팔달문은 조선왕조 22대 정조 임금이 1794년(정조 18년) 정쟁에 휘말려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 묘소를 양주땅 배봉산에서 화산(花山)으로 이장할 때 수원화성 성곽과 함께 건립되었다.

팔달문 앞 상가들의 모습

팔달문 앞 상가들의 모습

 

팔달문은 행궁을 둘러싼 성곽의 동서남북 4대 문중의 하나로 화강암으로 된 석축에 홍예문(虹霓門)을 내고 그 위에 여장(女墙)을 돌리고 2층 누각을 세웠다. 누각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이며 우진각 지붕의 건물이다.

 

아래층과 위층의 공포(攻砲)는 다포식(多砲式)이며 정문의 좌우에는 적대(敵臺)를 설치하여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문의 명칭은 성곽 중심부에 있는 팔달산에서 딴 것이며 남쪽 방향에 있어 남문이라고도 한다. 1964년 보물 402호로 지정되었다.

 

화홍문 인근 수원 시내를 남과 북으로 흐르는 광교천이 여름 장마철에 자주 범람하므로 1796년(정조 20년) 성곽을 축조하면서 하천을 준설하고 수원천 물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조절하기 위해 남과 북에 각각 수문을 설치했다고 한다. 상류에 있는 북쪽 수문은 일명 '북수문(北水門)'이라고 불린다. 수문은 7개의 무지개 모양의 석조 아치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 문루가 있다. 수원 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여름 장마철 넘쳐나는 물을 구경하는 주민들

여름 장마철 넘쳐나는 물을 구경하는 주민들
 

1970 연대~1980 연대 수원역 앞거리 모습

1971년 수원역 앞 거리의 모습(사진 윗쪽)  1987년 발전된 수원역 앞 거리 모습(사진 아래)

1971년 수원역 앞 거리의 모습(사진 윗쪽) 1987년 발전된 수원역 앞 거리의 모습(사진 아래)


사진이나 기록물은 한 시대의 역사의 증거물로 그시대의 정부 정책이나 국민들의 삶의 문화를 알 수가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수원시의 모습들은 100여 년 후 후손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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