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세상에 말한다, 나는 나혜석이다”
제11회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 열려
2019-04-29 11:44:26최종 업데이트 : 2019-05-10 15:49:47 작성자 : 시민기자   하주성
행궁동 나혜석 생가터 앞에서 열린 문화예술제

행궁동 나혜석 생가터 앞에서 열린 문화예술제

정월 나혜석, 우리는 그녀를 흔히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나혜석의 생전 당시 그 어느 누구도 나혜석과 같은 삶을 감히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여류화가요, 시인이다. 또한 여성의 권리신장을 주창한 신여성이기도 하다.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시 현 팔달구 화서문로42번길 11 인근에서 태어났다.

1948년 12월 10일, 당시 나이 52세로 세상을 떠난 나혜석을 기리는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가 팔달구 행궁동에서 그녀의 태어난 날을 기념하기 위해 27일, 28일 이틀동안 열렸다. 27일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나혜석은 참으로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되었던 인물이다. 나혜석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은 후세의 사가들 몫이기 때문이다.

나혜석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이다. 혹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화가요 문학가이며, 민족운동가에 여성해방론자' 라는 긴 수식어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는 견해도 없지 않다. 혹자는 나혜석을 '현대를 살아가는 개방적인 여성이라는 것은 찬성하지만,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난해함'을 지닌 여성이라는 것이다.

주민들이 무대에 올라 '홀로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주민들이 무대에 올라 '홀로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여성도 남성과 또 같은 권리를 가졌다

나혜석이 추구한 것은 남녀의 구분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복종하는 여성이 아닌 세상 밖으로 나와 남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살아가는 그런 여성을 추구했다. 인간으로, 그것도 당당한 여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것이다.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세계여행을 1927~1928년에 했다는 것은, 나혜석이 얼마나 신문물에 목말라 했는지 가늠이 간다.

결국 그러한 세계여행이나 그녀가 쓴 글을 통해 볼 때 치열하게 남들보다 앞장서서 세상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혜석이 스스로에게 다짐한 말이 있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한 마디가 바로 나혜석이 세상을 향해 한 말이다. 그리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단지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좀 더 진취적이고 불꽃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나혜석은 서양화를 전공했으며 여성의 권리신장을 주창한 신여성이다. 나혜석은 여성지식인들과 비밀회합을 열어 여성들을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계획을 세우고, 자금을 모으기 위해 해주와 평양지역을 돌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5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그런 나혜석을 우리는 아직도 독립운동가 반열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그녀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나혜석 생가터 길 선포식'을 동참하고 있는 참석인사들

'나혜석 생가터 길 선포식'을 동참하고 있는 참석인사들

독립운동의 산실 수원

수원은 정조대왕이 최초의 계획도시로 화성을 축성한 후, 일제치하에서 역사가 단절되는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성을 찾으려고 끊임없는 저항을 해온 곳이다. 수원의 독립운동가로는 민족대표 48인의 한분이었던 김세환, 구국민단의 박선태, 김노적, 임면수, 여성운동가인 이선경, 김행화, 나혜석, 삼일학교의 최문순, 임순남 등을 키워낸 곳이다.

『우리 조선여자를 위하여 일심전력하는 나혜석 여사는 금번 당지 팔번통 태성의원 내에 여자 야학을 설립하고 매주 3일간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열성으로 지도하여 입학지원자가 날로 많다더라』

1922년 3월경 신문에 난 기사의 일부이다. 나혜석은 안동에 도착한 후 이주한인사회와 연동된 사업을 시작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야학이었다. 안동은 나혜석에게 있어 인생의 제2막을 활짝 열게 한 곳이다. 남편 김우영이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부임했다. 나혜석도 약 6년간을 안동에 정착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인사회를 보듬으며 화가로서의 창작활동도 활발하게 이어나갔다. 나혜석은 안동의 생활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예술제에 참석한 주민들도 나혜석 생가터 길 선포식에 참여했다

예술제에 참석한 주민들도 나혜석 생가터 길 선포식에 참여했다

"사회상으로 사업을 해본대도 여기요. 개인적으로 남을 도와본대도 여기요. 인심에 대한 짠맛 단맛을 본대도 여기요"라고. 나혜석은 6년여 동안 안동에 거주하면서 남편 김우영의 일본영사관 부영사라는 직함을 이용해 한인사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 나혜석을 기리는 문화예술제기 행궁동 나혜석 생가터 앞에서 열린 것이다.

나혜석 생가터 길 선포식 가져

행궁동 '차 없는 거리'와 함께 열린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 염태영 수원시장은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에서 "나혜석 문화예술제는 순수하게 지역주민들이 만들어가는 예술제로 벌써 11년 째 계속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주민 스스로 만들어가는 문화예술제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높다"라고 했다.

나혜석은 말년에 행려환자로 생을 마감했다. 그동안 나혜석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정월 나혜석의 진면목은 우리가 깊이 알지 못한다. 그런 점이 더욱 마음 아프다. 나혜석의 생가터는 행궁동에 소재하고 있는데, 나혜석 거리는 전혀 무관한 인계동에 가 있다. 한 마디로 술집이 즐비한 거리에 나혜석 거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나혜석 생가터 문화에술제는 행궁동 차 없는 거리와 함께 열렸다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는 행궁동 차 없는 거리와 함께 열렸다

"이미 정해진 나혜석 거리를 돌려달라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거리에서 나혜석 생가터 길 선포식을 하고자 합니다." 행궁동 한창석 주민자치회장은 우선 '나혜석 생가터 길 선포식'을 갖고, 차후로 나혜석 기념관 등을 생가터 등에 조성하겠다고 향후 구상을 밝혔다. 나혜석 탄생 123년이 지난 2019년. 정월 나혜석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 행궁동, 차 없는 거리, 생가터 길 선포식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