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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의 의미를 되새기다
정조의 효심
2011-11-03 00:20:21최종 업데이트 : 2011-11-03 00:20:21 작성자 : 시민기자   안명자

함께 봉사하는 선생님들과 한달전부터 계획했던 융건릉을 다녀왔다.
아침에 날씨가 흐려 우산까지 챙기고 옷도 든든히 입었는데 오늘 날씨는 덥기까지 했다.

항상 바쁘신 우리의 회장님은 어제 저녁에 부군과 함께 데이트를 하며 보물을 숨겨두고 가셨단다. 오늘 융건능에는 초등학생, 유치원생, 일본인 관광객등 많은 사람이 가을의 낙옆밭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융건릉은 두 번째로, 예전엔 우리 가족만 한적하게 가을을 느끼고 왔었다.  오늘같이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것도 참 즐거웠다.

융건릉이란 융릉과 건릉을 합한 말로 융릉은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헌경왕후의 능이다. 건릉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을 말한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조선왕릉 40기가 올랐는데 40기의 능중 융릉과 건릉도 포함이 되었다고 한다. 융건능은 정조의 효심이 함께 하는 곳이다. 지금 수원을 효의 도시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융릉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비극의 세자 즉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와 한중록으로 유명하며,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진 헌경왕후가 함께 모셔진 능이다.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기슭에 수은묘로 있었다.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숭하고 난 뒤, 묘를 영우원으로 높였으며,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지시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붙였다. 

어느 날 아버지의 능 주변 소나무에 송충이가 대단히 번식하여 소나무를 갉아먹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행차를 서둘러 산에 와서 보니 송충이가 기승이자 정조가 진노하여, 송충이를 잡아 꾸짖고 '아무리 미물일 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먹느냐'며 깨물고 돌아서자 천둥번개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져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승하한후 부모님의 곁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1899년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하면서 현륭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는 1735년(영조 11년) 1월 21일에 창경궁에서 태어났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요절하고 영조가 40세가 넘어서 태어났기 때문에 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글씨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10세에 벌써 정치에 대한 안목이 생겨 집권세력인 노론이 처결한 신임사화를 비판하기도 했다. 

1794년 부왕을 대신하여 청정에 임하게 되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등이 영조에게 무고를 했다. 영조가 듣고 수시로 세자를 불러 크게 꾸짖었는데, 마침내 비정상적인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 부자간의 대립관계가 표면화된 것은 영조가 병석에 있을 때였다. 신하들이 세자에게 약을 부왕에게 권할 것을 종용했으나 거절하여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와 홍계희, 윤급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실덕과 비행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려 무고하는 사건이 있고 문 소의가 부자간의 이간책을 쓰자 격분한 영조는 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했다. 영조는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 않자 그를 서인으로 폐하고 세자와 영빈 이씨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인 5월 21일에 죽게 했다. 세자의 나이 28세 때의 일이었다.

건릉은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면서 왕위를 세자에게 넘겨주고 모후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으로 내려와 능묘를 돌보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나이 49세, 세자 나이 11세 때에 부스럼으로 갑자기 승하하였다. 처음에는 정조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의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가 정조의 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현 위치인 현륭원 서쪽 언덕에 이장하여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융건릉의 의미를 되새기다_1
융건릉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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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의 의미를 되새기다_2
융릉 사도세자의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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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의 의미를 되새기다_3
융건릉의 낙엽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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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의 의미를 되새기다_4
수많은 사람들의 소원탑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수원 화성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수원 화성에는 많은 사연이 숨겨져 있다. 정조의 꿈과 포부가 서려있는 화성, 정조가 일찍 죽은 까닭에 지금은 지방의 한 성곽으로 축소되었지만 화성은 알려진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예전에 화성성곽에 대해 알아본적도 있는데, 그중 방화 수류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군사 지휘소이며, 정자아래층엔 군사들의 숙직실까지 있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부모에 대한 효심까지 서구화 되어가는 이때, 융건릉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봄도 좋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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