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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살아있는 수원문학사’ 임병호 시인 발자취를 더듬다
김우영 언론인
2022-11-14 10:25:24최종 업데이트 : 2022-11-14 10:25:14 작성자 :   e수원뉴스

공감칼럼


 

지난 6일 가을 햇살 참 좋던 날 오후, 임병호 시인과 정수자 시인,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 관장과 나, 이렇게 네 명이 길을 나섰다. '수원문학의 대부' 임병호 시인이 살아온 흔적을 찾아 나선 길이다.


임병호 시인 삶의 자취를 찾아 나선 사람들. 왼쪽부터 김우영, 임병호, 정수자, 한동민

임병호 시인 삶의 자취를 찾아 나선 사람들. 왼쪽부터 김우영, 임병호, 정수자, 한동민

 

 

어느 날 한동민 관장이 말했다. 한 관장은 역사공부를 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지역 근·현대사를 깊게 연구하고 있다. 특히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꼼꼼하게 더듬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후배지만 존경심이 든다.

 

"형, 수원의 원로들이 대부분 돌아가시고 생존해계신 분들도 기억이 흐려져서 지역 현대사를 기록하는데 어려움이 많아요. 그래서 하루빨리 그 아래 분들이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발자취를 기록해야 할 것 같은데, 문학 쪽으로 임병호 선생님이 어때요?"

 

물론 대찬성했다.

 

 

나는 1986년 첫 번째 수원시사와 1999년에 나온 두 번째 수원시사 문학 부분을 집필하면서 임병호 시인의 문학성과를 기술한 바 있다. 임 시인은 내 의형(義兄)으로 고교시절에 만났다.

 

뭐,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나보다 임시인의 살아온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글의 성격상 그의 생애에 대한 내용은 제외했었다.

 

 

그런데 한 박사의 제안을 듣고 보니 모르는 것이 참 많았다. 태어난 곳이 어느 학교 운동장 가운데에 있던 집이라던데 그게 삼일학교인지, 매향학교인지, 연무초등학교인지 몰랐다. 또 거기서 이사를 간 집이 어딘지, 고 박석수 시인하고 한집에 살았다고 했는데 거기가 어딘지 듣기는 했어도 확실치 않았다.

 

한 박사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는 또 한사람이 있었다. 정수자 시인이었다. 자연스레 셋이 뜻이 맞아 임병호 시인을 모시고 가을 소풍을 겸한 추억여행에 나선 것이다.

 

 

임병호 시인은 그냥 밥이나 먹자고 부른 줄 알았단다. 그런데 다짜고자 연무대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걷자고 하니 "차타고 가는 거 아니었어? 나 잘 못 걸어. 아직 후유증이 있어서..."라고 힘없이 말한다.

 

 

시인은 지난해 가을에 뇌경색에 이어 대상포진으로 고생했다. 지난 5월엔 심장 수술을 받았다. 아주대병원에서 허벅지 쪽 혈관을 떼어서 심장으로 이식하는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앞두고 통화 했다. "십 수 년 전 우리 어머니도 똑같은 수술을 받았는데 그 병원 의사들이 우리나라 최고라더라. 수술 실패율이 0%라더라"라는 말로 안심을 시켜드렸다.

 

8~9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 투병기간 중 삶에 대한 많은 성찰이 있었나 보다.

 

시인은 최근 '강'(문학과 사람 펴냄, 1만2000원)이란 시집을 펴냈다. 세어보진 않았는데 서너 차례 펴낸 4인 합동시집까지 합치면 스무 번은 훨씬 넘는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과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날지는 모르지만 노년에도 시를 쓸 수 있는 삶이 행복하다"는 내용의 머리말과 '쓸쓸한 날 가끔 하늘나라에 가면/죽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모두가 밝은 얼굴로 희희낙락한다/아버지, 어머니, 형님도 뵙는데/생전보다 아주 강녕하시다/김만옥 박석수 김대규 시인들도/여전히 음풍명월, 천하태평이시다/서러움도 외로움도 없는 낙원/나는 가끔 저승에 가서 생기를 받아 온다"라는 시가 담겼다. 세상에, 저승에 가서 생기를 받아 오다니.

 

 

임 시인을 왜 '수원문학의 대부'라고 했는가하면 1965년 18세 나이로 전국 규모 동인지인 '화홍시단'을 창간했고 안익승·김석희 선생 등과 3인이 수원문인협회를 창립한 '살아있는 수원문학사'이면서 '인간 수원문학관'이기 때문이다.

 

 

1986년판 '수원시사(水原市史)'에서 나는 임병호 시인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1947년 수원에서 출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원을 떠나지 않으면서 묵묵히 시작과 후진양성을 해온 인물로서 10대 후반이었던 1965년 수원지역 최초의 전국 규모 문학동인지 '화홍시단'을 창간했다. '화홍시단'은 수원에서 창간됐지만 김석규 김용길 엄창섭 최호림 등 전국에서 많은 문인들이 참여한 전국 문예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화홍시단'을 창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광주의 '시향'과 안양의 '시와 시론' 동인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쳐 1975년 첫 시집 '환생'을 발간한 데 이어 '가을엽서' '神의 거주지' '우만동별곡' '아버지의 마을' 등의 시집과 동시집 '새들이 방울을 흔든다' 등을 계속해서 펴냈다. 수원문인협회 초대 및 2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기시인협회 회장, 경기일보 논설위원 겸 문화체육부장을 맡고 있다...(후략)'

 

물론 지금은 현직에서 은퇴했지만 '계간 한국시학' 발행인으로,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장으로 여전히 문학 활동을 왕성하게 펼치고 있다.

 

 

 

이날 우리는 쉬다가 걷는 임병호 시인의 안내로 연무대 인근 시인이 살던 옛 집터들을 둘러보고 왔다.

 

"이주 보상금으로 아버님이 여기다 집 세 채를 지었는데 형님이 사업을 하다가 싹 팔아먹었어. 하하하"

 

"저기 문간방에 살았는데 내 생일날 박석수와 김우영이 주먹다짐을 벌여 곤란했지. 어이구 그 놈의 성질머리들 허군"

 

"저 아래쪽이 박석수가 신혼살림을 차렸던 데야"

 

"우행(필자의 호)이 세 들어 살던 '우만동 우거'가 저기쯤이지?" '우만동 우거'는 내가 거기서 몇 년 살 때 지은 시다.

 

아련했다, 허, 벌써 40년이 넘어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구나.

 

동공원 억새밭을 걸으며 파안대소하는 임병호 시인(사진/김우영)

동공원 억새밭을 걸으며 파안대소하는 임병호 시인(사진/김우영)

<사진> 동공원 억새밭을 걸으며 파안대소하는 임병호 시인(사진/김우영)

 

 

그러나 장관을 이룬 동북공심돈과 방화수류정 성 밖 동공원 억새밭을 함께 걸으며 느낀 낭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임 시인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수술의 여파로 기력이 쇠해 걸움은 더욱 느려지긴 했지만 감성은 오히려 훨씬 풍성해진 것 같았다.

 

저녁 식사 자리엔 김애자 시인과 김준기 시인도 동석했다.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행궁동 골목의 퓨전 한식집을 거쳐 단골 생맥주집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찍 헤어졌다.

 

오늘따라 수원이 더 좋다. 정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곱절로 좋다.


저자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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