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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수원천에 난리가 났네"
김우영 언론인
2022-10-07 17:18:10최종 업데이트 : 2022-10-07 17:17:49 작성자 :   e수원뉴스

공감칼럼

 

지난 주말 한동네 사는 ㅎ의 딸이 혼인식을 했다. 예식장은 광명시였다. 예식시간이 3시 40분이어서 식사를 마치고 수원에 오니 5시 30분이다. 동행했던 ㅊ, ㄱ과 커피를 마시고 화홍문으로 갔다.

 

미디어 아트를 보기 위해서다.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난 세 번째 보는 것이지만 ㄱ은 처음이다. ㄱ은 수원문화원이 발행하는 계간지 '수원사랑' 원고 청탁을 받고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미디어아트쇼를 보기 위해 수원천에 몰린 인파(사진/김우영)

미디어아트쇼를 보기 위해 수원천에 몰린 인파(사진/김우영)

 

주관적인 평을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해 화서문에서 했던 작품들 보다는 좀 미흡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아쉬움을 달래준 것은 남수문까지 펼쳐지는 미디어파사드, 인터랙티브 아트, 키네틱 아트, 레이저터널, 특수조명을 활용한 미디어아트, 수원천 내 계단, 벤치, 징검다리 등의 라이팅 아트 작품들이었다.

 

 

수원천을 가득 메운 인파들 속에서 이런 말들이 들려온다.

 

"환상적이네. 수원천이 이런 곳이었어?"

 

"우리도 서울에서 왔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온 거야? 아주 난리가 났네"

 

"우리 탄천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통닭축제도 열린다는데 통닭집이 어디가 좋을지 수원사람들에게 물어보자"

 

말을 들어보니 절반 이상은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이다.

 

 

이날은 미디어아트쇼와 통닭거리 축제, 세계유산축전 수원화성이 동시에 열리는 날이어서 성안동네는 매우 붐볐다. 음식점이나 카페, 술집들은 앉을 자리가 없었다.

 

 

수원천을 따라 남수문까지 갔다가 제방위로 올라가 돌아오는 길, 문득 세상을 떠난 한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심재덕.

 

그는 화성행궁 복원, 서호 개방, 화성 세계유산 등재, 연화장 건립, 월드컵 유치 및 전용경기장 건립, 화성문화제 활성화, 수원천 살리기, 화장실문화운동, 소각장 건립 등 수원의 미래를 위한 사업들을 쉼 없이 펼쳤다. 하지만 70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와 함께 화성행궁 복원, 서호 개방, 수원천 복개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수원사랑'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 글을 써서 당위성을 알렸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수원천 복개반대운동에 적극적이었는데 그 때문에 일부 시의원과 시장상인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수원은 지명에서도 나타나듯이 물과 관련이 깊은 도시이며 도시의 중심에는 수원천이 자리하고 있다. 수원사람들의 마음의 고향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나이든 시민들은 어렸을 때 수원천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물고기를 잡고, 빨래하던 추억을 지니고 있다.

 

특히 수원팔경 중의 ▲화홍관창(華虹觀漲:화홍문 수문에서 흘러내리는 수원천의 물줄기) ▲남제장류(南堤長柳:수원천 제방에 늘어선 버드나무들) 등 두 가지나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정도로 수원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하천이다.

 

 

정조대왕도 화성을 축성할 때 수원천의 자연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 규모·형식·구조 등을 결정했다.

 

수원천을 건너는 성벽 구간에 화홍문(북수문)과 남수문 같은 빼어난 부속 건축물을 만들었으며, 화홍문 옆에는 조선시대 건축물의 백미라고 평가되는 방화수류정을 만들어 하천과 조화를 이뤘다. 따라서 화성은 수원천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운 존재로 수원천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자연문화재라 할 수 있다.

 

 

몇 년 전 한 매체에 당시의 이야기를 썼다.

 

'1988년 당시 심재덕 수원문화원장이 '수원사랑' 주간 일을 맡고 있던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김 주간, 나는 수원천을 수원의 상징이자 환경·역사의 젖줄이기 때문에 복개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해?" 그러면서 '수원천 살리기'의 '복개 반대' 당위성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기획기사를 수원사랑에 연재하자고 제안했다. 이로써 수원천 살리기 시민운동이 점화됐다. 첫 번째 포문은 주간인 내가 열었다. 1989년 '수원사랑' 1월호였다...(중략)...그때 나는 세상 두려운 줄 몰랐던 30대 초반의 나이였고 심재덕 수원문화원장은 갓 50세였다. 이렇게 시작된 수원천 복개 반대 운동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지역·중앙 언론들이 수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원천 복개 논란을 앞 다투어 집중보도했다...(중략)...복개 찬성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일부 정치인, 그리고 수원천 주변 일부 상인이나 대중교통 운전사 등은 교통문제를 앞세우며 우리를 비난했다. 이미 죽어버린 수원천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단정한 뒤, 냄새나고 불결한 수원천을 차라리 덮어버려 교통난 해소를 위한 도로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시민단체가 모여 수원천되살리기시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대대적인 복개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외로운 싸움은 오래도록 계속됐다. 물론 최전방에 섰던 나도 날선 공격을 받았다.'

 

 

그러다가 심재덕 수원문화원장이 1995년 6월 제1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서 초대 민선 수원시장에 당선됐다. 그는 문화재를 지키고 수원천을 살리기 위해 복개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진행 중이었던 복개공사는 중지됐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수원천이 되살아난 것이다. 1997년엔 물고기들이 돌아왔고 각종 야생화가 핀 하천에서는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수원천의 기적'이 일어났다.

 

 

수원천에 일어난 기적.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사진 이용창 (사)화성연구회 이사

수원천에 일어난 기적.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사진 이용창 (사)화성연구회 이사

 

수원천을 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을까? 맑은 물 속에서는 어른 팔뚝 보다 더 굵은 물고기가 유유히 놀고, 청둥오리와 백로 등 야생조류가 돌아왔으며 시민들의 산책코스로 사랑받는 수원천은 수원의 자랑이다.

 

 

그분이 살아 계셔서 수원천에 펼쳐진 미디어아트쇼를 보았다면 누구보다 기뻐했을 텐데.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일합니다. 수확은 후손들이 할 것입니다."

 

심재덕이 뿌린 씨앗은 잘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었고 우리들은 그 혜택을 제대로 누리고 있다.


저자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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