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공감칼럼] 전북 부안에서 수원화성 축성 계획이 시작됐다고?
김우영 언론인
2022-05-30 09:50:39최종 업데이트 : 2022-05-30 09:50:31 작성자 :   e수원뉴스

.

 


간만에 가슴이 설렜다. 젊은 시절의 첫 번째 해외여행 전날 밤 만큼은 아니지만.

 

2019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간트와 타쉬겐트 답사여행 이후 처음으로 가는 (사)화성연구회의 단체 답사 여행이기 때문이었다. 화성연구회의 답사여행은 참으로 재미있고 유익하다. 남들이 잘 안가는 곳도 잘 찾아서 다닌다.

 

화성연구회 답사 중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기억에 남는 곳은 2002년 중국 대동 운강석굴과 대동고성, 태원 인근에 있는 평요고성과 쌍림사 코스였다.

 

 

그 뒤로도 매년 해외답사를 빼놓지 않고 다녔는데 중국 만주 지역의 고구려 유적지와 항일운동의 터전이었던 백두산 자락은 남의 땅 같지 않았다.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발해 유적지와 일제 독립항쟁 유적지도 답사했다. 항일무장투쟁이 격렬했던 오지 중의 오지 파르티잔스크(빨치산스크)와 이순신장군이 만호로 근무했던 녹둔도,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핫산지역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몇 년 전에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보로부드르 사원과 프람바난 유적지, 메라피 화산을 보고 왔으며 코로나19가 오기 전인 3년 전엔 전기한 것처럼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유적들을 돌아왔다.

 

이밖에도 중국과 일본, 대만, 베트남 등지의 세계문화유산과 성곽들을 찾아다녔다.
 

 

지난번 이사회 때 올해는 답사를 재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때마침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도 대폭 완화된 시점이어서 쉽게 1박2일 국내 답사가 결정됐다. 답사여행지는 전북 부안군이었다. 사실 나를 비롯한 회원 대다수는 몇 차례 부안여행을 다녀왔다. 나도 개암사, 신석정 문학관, 반계 유형원서당, 내소사, 채석강 등을 서너 차례는 방문했다.

 

그럼에도 많은 회원들이 참여했다. 밖으로 나가서 늦은 봄 향기로운 풀냄새를 맡아 보는 것도 좋지만 회원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번 부안 답사여행에서는 개암사와 매창공원, 청자박물관, 반계서당, 채석강 지질공원, 내소사, 신석정문학관을 차례로 방문했다. 이 가운데 매창공원과 청자박물관은 처음 가봤다.

 

지역 문화관광해설사인 박옥희 선생이 이틀 동안 우리를 전담해 해설을 맡아줬는데 회원 모두 만족해했다.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짚어내는 해설 솜씨에 우리는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허균과 정사암과 홍길동전', '홍길동전과 율도국과 위도', '허균과 매창' '반계 유형원과 실학' 등, 다양한 콘텐츠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부안이라는 그의 말에 모두들 수긍했다.

 

반계서당에서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사)화성연구회 회원들.(사진/김우영)

반계서당에서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사)화성연구회 회원들.(사진/김우영)

 

답사의 압권은 반계서당이었다. 나로서는 네 번째 방문이었지만 박옥희 선생의 해설을 들으니 처음인 듯 새롭다.

 

여기에 더해 화성연구회 부이사장인 김준혁 한신대 교수가 감동적인 설명을 곁들였다. 김준혁 교수는 모두가 공히 인정하는 '정조 전문가'이자 '화성 전문가'다.

 

 

김교수는 부안 반계서당은 옛 수원을 현재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구상한 발상지(發想地)라고 했다. 따라서 화성연구회의 뿌리도 이곳이라고 말했다. 박옥희 해설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정인보는 "조선 근고의 학술사를 종계하여 보면 반계가 일조(一祖)요, 성호가 이조(二祖)요, 다산이 삼조(三祖)"라고 하였다. 반계가 실학파의 비조(鼻祖: 시조)라는 것이다.

 

 

실제로 반계가 저술한 '반계수록' '보유편(補遺編)'에는 "수원도호부에 광주(廣州) 하도(下道)의 일용면 등(6 개면)을 떼어 붙이고 읍치를 평야에 옮겨야 한다. 임천(臨川)과 지세(地勢)도 읍성을 쌓을 만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읍치의 규모로서는 평야가 뛰어나니 정말로 대번진(大藩鎭)의 기상이 있는 곳이다. 이 지역 내외에 만호쯤은 가히 들어앉을 수 있을 것이다." "축성하는 일과 같이 힘이 드는 일은 향군(鄕軍)으로서 정번(停番)한 사람의 힘을 빌리어 충당하는 것이 좋다."는 내용이 있다.

 

 

반계수록은 그의 국가의 경영에 관한 생각을 14책 26권에 담은 것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670년이다.

 

이에 정조대왕은 "유형원의 '반계수록 보유'에 수원의 읍치(邑治)를 북평(北坪)으로 옮기고 성지(城池)를 건축해야 한다는 논설이 있다. 100 년 전에 마치 오늘의 이 역사를 본 것처럼 미리 이런 논설을 한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반계서당에서 본 마을(사진/김우영)

반계서당에서 본 마을(사진/김우영)

 

반계서당에서 내려오는 산길 좌우로는 엉겅퀴꽃이 유난히 많았다. 요즘 도시근처에서는 보기 힘든 식물이다. 전에는 보이는 대로 뽑아버려도 계속 올라와 농민들의 미움을 받던 식물이지만 지금은 약효가 뛰어나다며 뜯어가 귀한 몸이 됐다.

 

도시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며, 깨끗한 산간지역과 농촌지역에서만 잘 사는 엉겅퀴를 보며 반계수록을 생각한다.

 

만약 반계선생이 한양을 버리고 부안으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이 명저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

 

 


추천 2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