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쌓은 진정한 이유
최형국/역사학 박사, 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 시범단 상임연출
2017-03-10 16:55:00최종 업데이트 : 2017-03-10 16:55:00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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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음력 1월 29일, 정조는 지난해 완공된 수원 화성을 둘러보기 위하여 아직 겨울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수원으로 행차하였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을 통과한 어가행렬은 화성행궁에 잠시 머물렀다가 바로 팔달산 위로 이어졌다. 정조는 신하들과 함께 허리가 긴 화양루(華陽樓) 북쪽을 시작으로 서장대를 거쳐 화서문을 지나며 새로 쌓은 성의 특성을 직접 신하들에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화성야조-연거도 : 정조가 갑주를 입고 서장대에 올라 지휘했던 '야조'의 모습이다. 수원 화성의 밤을 밝혔던 군사훈련은 군사들은 물론이고 백성들까지 모두 함께 참여하였다. 정조가 지키고자 했던 '사람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 그것이 수원 화성의 본질적 가치다. 밤이 되자, 정조의 명령에 따라 수천의 군사들과 수원 화성에 사는 모든 백성들이 일사분란하게 함께 횃불을 들어 올리고 등불이 밝혔다. 정조의 주변에는 한중일 삼국의 군사무예를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실린 무예24기를 익힌 장용영(壯勇營) 군사들이 늘 함께 하였다. 장용영(壯勇營)은 정조가 직접 계획하고 설치한 국왕 친위 군사조직으로 서울에는 내영(內營)을 그리고 수원 화성에는 외영(外營)을 별도로 설치하여 기존의 군사조직을 압도하는 형세였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도 정조의 명으로 당대 최고의 실학자로 불리던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군사 무예의 달인 백동수가 편찬을 담당하고 장용영에서 출판의 모든 일을 진행했기에 실용적인 무예서로 거듭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야간군사훈련인 '야조(夜操)'를 지켜보던 정조는 불야성을 이루는 성곽을 바라보며 화성행궁으로 돌아와 신하들에게 앞으로 수원 화성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밝혔다. "수원 화성이 완성되었으므로 지금 제일 급한 것은 '집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화락하게 하는 것[戶戶富實 人人和樂]'의 여덟 글자이다." 이 말의 의미는 수원 화성이 단순한 군사적 용도인 성곽의 개념을 넘어 그 안과 밖에 살고 있는 '사람'이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 가장 먼저 풀어야할 숙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 아무리 튼튼하고 강한 성곽을 쌓아도 그것을 지키는 군사들과 그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삶이 풍요롭지 않다면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정조는 참으로 잘 알았다. 국왕이 가진 권력의 힘으로 억지로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군사들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화성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이 생길 때 비로소 수원에 화성을 쌓은 정조의 마음을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보호하고, 그 주변에 사는 백성들을 지키고 잘 살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 그것이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건설한 진정한 이유였다. 정조가 수원 화성에 투영하고자 했던 마음은 '지킴의 미학'이었다. 뒤주 속에서 갇혀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능을 지키려 했던 아들의 마음, 어린 아들 순조가 성군이 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주고픈 아비의 마음, 거기에 조선에 살고 있는 온 백성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고픈 군주의 마음이 복합된 곳이다. 정조와 수원 화성의 핵심 연결고리는 '사람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었다.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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