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깔끔하셨다. 소금으로만 간을 맞춘 맛깔스런 동태전골, 하얀 밥알이 동동 뜨는 맑은 식혜, 생태 알로 만든 별미, 어란(魚卵) 등 음식솜씨도 깔끔하셨지만, 이웃들과 함께 한 음식그릇을 설거지하고 난 뒤, 성에 차지 않으면 그 그릇들을 다시 설거지할 정도였다. 1935. 시댁 몰래 사진관에 들러 한방 찍었다는 어머니 어머니는 실용주의 실천자다. 가끔 여름철에도 춥다 느껴지면 스웨터를 챙겨 입고 산책길에 나섰다. 여름철에 웬 스웨터냐고 물으면, 내가 추운데 스웨터면 어떻고 몸뻬(もんぺ)면 어떠냐고 되돌아본다. 세월이 흘렀어도 어머니는 가끔 주방 그릇들을 정리했다. 그런데 우연히 주방을 들여다보다 사기 밥그릇 표면에 고춧가루 한 점이 붙어있는 것이 눈에 띠었다. '그렇게도 깔끔하신 분이 고춧가루 한 점을 놓치셨구나'. 어머니는 늘 젊고 건강한 분으로만 생각하였던 나는 순간 '아차, 팔순이 넘으셨지'라는 생각에 싱크대 앞에서 소리 없이 통곡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심을 예견하셨는지 모시옷, 한복 한 벌, 이불, 요 한 벌과 평소 몸에 지니고 계시던 염주, 불교 서적들 그리고 TV장식장 한쪽의 '초이스'커피 등 소지품 몇 종만을 남기셨다. 돌아가시면서도 자식들에게 끼칠 불편을 최소한도로 줄여주기 위함이었을 게다. 소지품 중에는 표지가 낡고 조그만 모 국회의원 홍보용 수첩과 색동무늬 손지갑이 있었다. 수첩을 들쳐보니 어머니가 직접 쓰신 자식들과 친지 분들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맨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난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뒤표지의 까만 비닐 사이에 빠끔히 내민 내 대학시절 증명사진 그리고 어릴 적 찍은 가족사진(사진 찍기 싫다고 도망가는 바람에 여기에는 내가 없었다). 아마도 가족사진 중에 내 얼굴이 없어 따로 대학 때 사진을 간직하고 계셨었나 보다. 색동무늬 손지갑은 대학시절 학우에게서 얻은 것이다. 금은방을 하면서 손님들에게 사은품으로 건네던 지갑이었다. 나는 이 지갑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리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평범한 이 지갑을 평생 곁에 두고 지냈다. 색동무늬가 예뻤다기보다는 당신 자식이 드렸기 때문일 게다. 어머니는 이 지갑을 30년도 넘게 간직하셨다. 오직 자식 잘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내가 평범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의 음덕일 게다. 엄마가 보고 싶다. 1951. 대구 피난시절. 건물은 동대구 기상관측소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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