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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2022-03-14 09:49:18최종 업데이트 : 2022-03-18 10:27:39 작성자 :   e수원뉴스 김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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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하얀 소복 입고 고종의 승하를 슬퍼하며/대한문 앞 엎드려 통곡하던 이들/꽃반지 끼고 가야금 줄에 논다 해도 말할 이 없는/노래하는 꽃 스무 살 순이 아씨/읍내에 불꽃처럼 번진 만세의 물결/눈 감지 아니하고 앞장선 여인이여/춤추고 술 따르던 동료 기생 불러 모아/떨치고 일어난 기백/썩지 않은 돌 비석에 줄줄이/이름 석 자 새겨주는 이 없어도/수원 기생 서른세 명/만고에 자랑스러운 만세운동 앞장섰네./김향화...(중략).../오! 그대들 수원의 논개여! 독립의 화신이여!

 

여성독립운동가 20인의 일생을 그린 이윤옥 시인의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에 수록된 '수원 기생 김향화'다. 
 

김향화 지사는 1896년 7월 16일 생으로 본명은 순이(順伊)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수원 기생이 됐으며 '수원예기조합'의 꽃이었다. 검무와 승무에 능했고, 경성잡가와 서관소리를 잘 불렀다고 한다.

 

1919년 3월 29일 당시 스물셋의 기생 김향화는 32명 기생들과 수원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됐다. 이후 2개월여의 감금·고문을 당한 후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보다 앞서 1919년 1월 고종 승하 때는 수원기생들과 함께 덕수궁 대한문 앞에 가서 소복을 입고 통곡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김향화 지사는 잊혀진 인물이었다. 향토 사학자들의 기고문과 지역 언론에서나 가끔 언급됐을 뿐이어서 수원사람들 조차도 그를 잘 몰랐다.

 

김향화 지사의 의거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수원시 이동근 학예연구사(현 수원박물관 교육홍보팀장)의 공이 크다. 그는 지난 2008년 수원기생들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담긴 자료를 토대로 한 연구 성과를 공개했다. 그리고 김향화 지사는 지난 2009년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아 대통령 표창과 함께 독립유공자가 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후손을 찾을 수 없어 김 지사의 훈장은 지금까지 수원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김향화 지사의 이야기는 지난 2019년 영화 '항거-유관순'에도 소개되고 있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여성들 가운데는 개성 3·3 만세운동을 주동한 권애라와 심명철, 신관빈, 8호실 방장이자 일제의 모욕과 고문 앞에서도 꼿꼿했던 어윤희, 파주 만세운동 주동자이자 옥중에서 출산한 임명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 노순경, 1920년 함북 명천 만세운동 주동자 동풍신, 종로 만세 사건 주동자이자 루씨여학교 교사였던 이신애, 그리고 3월 29일 수원경찰서 앞에서 만세운동 주동한 기생 김향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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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항거-유관순' 한 장면. 가운데 인물 중 오른쪽이 김향화(김새벽 분)고 왼쪽이 유관순(고아성 분)이다.

  

실제로 김향화 지사는 유관순 열사와 같은 감방에서 생활했다.

지난 2018년 8월 광복절에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김향화 지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갇혔던 여자 감옥 안에 김향화 지사의 사진이 전시돼 있었으며 그 옆 담장엔 김향화 지사의 얼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병헌이 1959년 펴낸 '3.1운동 비사'에는 3월16일 수원장날 시위와, 3월29일 김향화 등 수원기생들의 만세 시위도 기록돼 있다.


'3월 29일 수원기생조합 기생일동이 그곳 자혜의원으로 건강검사를 받기 위하여 가다가 경찰서 앞에서 동(同) 기생 김향화가 선두에 만세를 부르고 지휘 하에 일제히 만세를 부른 후 병원으로 가서 다시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병원에서는 검사할 것을 거절하여 기생들은 그대로 나오다가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 조합 취체역(取締役-현재의 이사) 김향화는 곧 체포되어 공판에 회부된 바 6개월 형을 받았다'

 

당시 매일신보도 이들의 만세시위를 보도했다.


'(3월)29일 오전 11시 반경에 수원기생조합 기생 일동이 자혜의원으로 검사를 받기 위해 들어가다가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몰려 병원 안으로 들어가 뜰 앞에서 만세를 연하여 부르다 병원에서 내어 쫓음으로써 경찰서 앞으로 나왔다가 인하여 해산되었는데 조합 취체 김향화는 경찰서로 인치 취조 중이더라'

 

김정명이 1967년 펴낸 '조선독립운동'에도 수원지방의 독립만세운동 기록이 있다. 


'(3월) 29일에 이르러 약 30명이 자혜의원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밤에는 상인, 노동자, 무뢰한 등이 시내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 폭행을 함으로써 수원경찰서원은 보병과 소방조원과 협력하여 경계중임'

 

김향화 등 수원기생들이 만세를 외친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의 기생들도 뒤를 이어 자발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틀 뒤인 3월 31일 경기도 안성에서는 변매화 등의 기생들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의 시위에는 1000여 명의 군중이 호응했다고 한다.


4월 1일 황해도 해주에서는 기생들이 독립만세 결사대를 조직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낸 피로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했다. 4월 2일엔 경남 통영에서도 기생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이소선과 정막래 등은 소복 차림으로 통영 시장거리에서 시위에 앞장섰다.

 

"기생은 화류계 여자라기보다는 독립투사였다.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튀었고, 놀러 오는 조선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사상을 불 지르고 있었다"고 기록한 일본인도 있었다.
 

 

3월이다. 대통령 선거 때문에 혹시 잊지는 않았는가. 이제 마음 다스리고 3.1운동을 생각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라도 더듬어보는 것이 우리의 도리다.


* 본 칼럼의 내용은 e수원뉴스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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