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공감칼럼] ‘영원한 수원시장’ 심재덕,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다
김우영 언론인
2021-12-27 09:52:26최종 업데이트 : 2021-12-30 16:34:33 작성자 :   e수원뉴스

썸네일

 

'영원한 수원시장' '미스터 토일렛'으로 불리는 고 심재덕 전 수원시장이 23일 수원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제2회 수원시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심재덕 전 수원시장(1939~2009), 세계적인 원예육종학자 우장춘 박사(1898~1959), '통일벼의 아버지' 허문회 박사(1927~2010), 우리나라 최초 임학 분야 박사인 임목육종학자 현신규 박사(1911~1986) 등 4명이 헌액됐다.

 

나와 인연이 깊었던 이는 심재덕 전 시장이다. 그는 2009년 1월 14일, 70세의 아까운 나이에 영면에 들었다. 이제 몇 년 더 지나면 나도 70인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3년이 다 돼간다. 세월이 이렇게 빠르다.

23일 수원시청에서 열린 '수원시 명예의 전당' 헌액식

23일 수원시청에서 열린 '수원시 명예의 전당' 헌액식

 

내 부모를 제외한 타인의 죽음에 그렇게 먹먹했던 적이 있었던가?

 

아무튼 그때의 먹먹했던 슬픔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심재덕 시장은 내가 인생의 사표(師表)로 삼은 이였다.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이었다.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것을 배웠다. 한발 앞선 아이디어와 추진력, 용기와 결단, 청렴, 그리고 깊은 의리와 따듯한 가슴...

 

다른 이들이 있을 때는 '김주간'(수원사랑 주간), '김부장'(ㅈ일보 문화부장)이라고 호칭했지만 단 둘이 있을 때면 '아우님'이라고 했던 '큰 형님'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써서 영전에 올렸다.

 

'그이가 갔다/아마도 전생에 정조대왕이었을 사람/아마도 채제공이거나 정약용이었을 사람/왔던 자리로 그이가 돌아갔다//수원의 큰 나무였던 이/광교산처럼 듬직했던 이/서둔 들판처럼 품이 넓었던 이...(중략)...하지만 그이는 아직 수원의 심장 속에 살아계신다/가슴 속을 흐르는 생명의 수원천으로/서호의 아름다운 노을로/빛나는 세계문화유산 화성으로/팔달산 솔숲을 지나가는 푸른 바람으로/언제까지나 거기 계신다/거기 계신다'

 

sk아트리움에서 열린 추모식 때 무대에서 이 시를 읽다가 잠시 울컥 목이 메었다. 객석에서 몇몇이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두 달 전쯤인가 한 지역신문에 '심재덕, 수원시 명예의 전당에 올라야 한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고맙다.

 

고인의 수원시 명예의 전당에 헌액은 마땅한 일이다.

 

수원시 명예의 전당은 지난 2018년 8월 14일에 시작됐다. 전당이라고 해서 독립된 건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수원이 자랑할 만한 인물들을 선정해 공적을 시청 본관 로비 벽면에 걸어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독립운동가 임면수·김세환·이선경·김향화 선생, 서지학자 이종학 선생, 기업가 최종건·최종현 회장, 평화활동가 안점순 할머니 등 '수원을 빛낸 인물'들이 선정됐고 이번에 심재덕 시장이 우장춘 박사·허문회 박사·현신규 박사와 함께 추가로 선정된 것이다.

 

심재덕 전 시장이 이뤄낸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원천 살리기, 수원화성행궁 복원사업, 서호 개방운동, 팔달산 터널 반대운동 등을 잇달아 펼쳤다. 수원천 살리기 사업은 서울 청계천보다 1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수원문화원장 시절부터 추진했던 화성행궁 복원사업도 계속돼 시장 재임 때 복원 공사가 시작됐다. 수원경찰서와 경기도립수원의료원, 경기도여성회관, 신풍초등학교까지 이전시켜야 하는 이 사업이 성공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문화관광의 도시가 됐다.

 

심재덕 전 시장의 유족들

심재덕 전 시장의 유족들

 

수원화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킨 것도 그의 공적이다. 정부 관계자는 수원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비관적이었지만 단신으로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고 세계 각국의 위원들을 설득시켜 수원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성공시킨 것이다.

 

2002년 월드컵 경기를 수원에 유치하고 월드컵 경기장을 지은 것도 그였다.

 

기피 시설인 화장장(연화장), 쓰레기 소각장, 하수종말처리장 등도 그가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가 마지막 힘을 쏟은 일은 화장실문화운동이었다. 수원시내의 공중화장실을 '혁명적 수준'으로 개선해 수원을 '세계 화장실문화운동의 메카'로 만들었다. 세계화장실협회를 창립하고 본부를 한국에 유치했다. 아예 자신의 집을 변기 모양으로 짓고 택호를 '해우재'라고 명명했다. 유족들 역시 본받을만한 사람들이었다. 심 시장 사후 2009년 해우재 건물과 땅, 유품을 수원시에 무상으로 기증한 것이다.

 

 

심재덕, 그와 함께 벌였던 수원천 살리기, 수원화성행궁 복원사업, 서호 개방운동 등을 생각할 때마다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오늘.

 

살아계셨으면 이제 만 83세. 아직 대포 한잔 할 수 있는 나이인데. 당신의 친구 홍기헌 큰형님은 지금도 거의 매일 저녁 친구나 후배들과 술자리를 갖고 계신다. 당신의 생전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그래서 아쉽다. 그래서 더 보고 싶다.

 

* 본 칼럼의 내용은 e수원뉴스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자약력

저자약력

공감칼럼


추천 1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