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정조(正祖), 달의 리더십
최형국/역사학박사, 수원시립공연단(무예24기) 상임연출
2016-02-06 10:20:28최종 업데이트 : 2016-02-06 10:20:28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조선의 22대 국왕이자 수원 화성을 건설한 조선후기 문예부흥을 이끈 정조(正祖)가 사용한 호다. 보통 '홍재(弘齋)'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지만, 어여삐 여긴 백성들과 조선이라는 국가를 뒤로 하고 하늘로 떠나기 2년 전인 1798년 다시 새로운 호를 지은 것이 그것이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를 보면 정조는 달을 이렇게 생각했다.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머무르면 달도 함께 머무른다.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돌아 흐르면 달도 함께 돌아 흐른다. 그러나 그 물의 큰 근본은 모두 달의 정기(精氣)이다. 나는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서 그 상태를 드러내는 것은 사람들의 형상이고, 달은 태극이며 그 태극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이 만 개의 개울을 밝게 비춘 달에 태극의 신비로운 작용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조(正祖), 달의 리더십_1
화서문 위에 뜬 달- 한 달에 한 번씩 화성의 밤 하늘에는 정조의 마음을 담은 둥근 달이 떠오른다. 그 달을 보면, 만백성의 마음을 골고루 어루만지는 그런 지도자가 그리워진다.

그는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원죄와 같은 굴레를 어깨에 지고 왕위에 올라 힘겹게 20여년을 국정을 살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고, 장용영을 만들어 군권을 다지고, 할아버지인 영조의 가르침에 따라 탕평의 국정을 펼치고자 애를 썼던 정조의 젊은 시절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세종과는 다른 철인정치를 구현하고자했던 정조의 초기 국정운영색깔은 다분히 태양과도 같은 강압적인 모습이 많았다. 그러나 20여년이 흐른 후 정조는 새로운 리더쉽을 고민했다. 그것이 바로 달의 리더쉽이다. 태양처럼 강인하지는 않지만, 달빛처럼 고요히 백성들의 마음속에 스며들고 싶어 했던 것이 그것이다.

그 달의 리더십의 핵심에 있는 것이 '사중지공(私中之公)'이다. 정조는 공과 사의 관계를 깊이 있게 고뇌하였다. 요즘도 그러하지만 겉으로는 '애국'을 말하고 '공명'을 말하지만, 그 안에는 지극히 사리사욕적인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정책추진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정조는 사중지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심(私心) 안에 공심(公心)이 있으며 공심 안에 사심이 있으니, 사심 안의 공심은 외양은 비록 굽어도 내심은 용서할 만하며 공심 안의 사심은 겉모습은 비록 정직해도 속마음은 굽어 있다."(私中自有公 公中亦有私. 私中之公 外雖曲而內實可恕. 公中之私 貌雖直而心却回互. '홍재전서')

보통 음(陰)과 양(陽)을 구분할 때, 태양은 양이요, 달은 음이다. 공심은 양이요, 사심은 음이다. 태양 없이는 달도 존재할 수 없고, 공심과 사심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겉으로는 밝고 환한 미래를 이야기하며 만백성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 정책의 추진 과정 속에서 수많은 사심들이 작동하여 궁극적인 가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비록 사심으로 시작된 일이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사람들에게 이롭게 작동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수원에 화성을 건설한 것이나, 규장각과 장용영을 창설한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어찌 보면 그러한 정책추진의 흐름이 보다 현실적인 관심을 가능케 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태양빛의 강렬한 힘으로 억지로 정책을 추진하기보다는 은은한 달빛이지만 만인의 마음 속에서 오래도록 잔잔히 스며드는 그런 위민의 정치가 바로 달의 리더십이다. 

바야흐로 총선 정국 속에서 모든 후보들은 태양처럼 강렬하고, 설탕처럼 달콤한 공약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때, 정조가 생각한 달의 리더십을 다시금 되뇌여 본다.

프린트버튼캡쳐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