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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동남각루엔 이런 사연이 있다
김우영 언론인
2023-07-02 16:22:29최종 업데이트 : 2023-07-02 16:22:13 작성자 :   e수원뉴스

동남각루엔 이런 사연이 있다


(사)화성연구회는 지난 5월 30일부터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화성박물관에서 '2023년 수원화성 바로 알기 강좌'를 열고 있다. 오는 7월25일까지 12강으로 진행되는 이 강좌는 화성과 관련된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강사진은 역사, 문학, 무예, 고건축,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6월 13일 강의를 맡았던 정수자 박사는 한국 시조문학계에서 손꼽히는 시인으로써 나와는 40년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강의 내용에도 '팔이 안으로 굽는' 그 오랜 우정은 개입돼 있었다. '문학으로 만나는 수원의 삶'에 정조대왕, 임병호, 박석수 시인과 함께 내 작품도 끼워 넣은 것이다.

 

사진 억새꽃이 무성한 동남각루 / 사진-김우영

사진 억새꽃이 무성한 동남각루 / 사진-김우영

 

그 시가 '바람, 억새꽃, 동남각루'다.


 

그 늦은 가을

 

남수문 지나 동남각루 가는 언덕길엔

 

바람 불 때마다 휘청 낭창 억새꽃들

 

 

유난히 모여 피어있네

 

밤 되면 넋인 듯 흰옷의 그림자

 

그 사이로 알 듯 알 듯 지나가네

 

 

"자, 이 술 한잔 받으오"

 

그 언덕에서 목 떨어진

 

천주학쟁이나 민란 적 칼회 사람이거나 살인강도거나

 

 

효수된 목 찾아가기 위해

 

애간장 다 녹아 서성대던 부모형제들이거나

 

그냥 길 가던 낙백 선비이거나

 

수해 때 무너져 내린 토사에 몸 묻힌 영혼이거나

 

 

 

거기 동남각루 아래 주막서 막걸리 한잔 할 때

 

어쩐지 추운 목숨처럼 바람 다가오거든

 

 

 

"이 잔 드시고 가시우"

 

억새꽃 위에라도 뿌려주시게

 

- 졸시 '바람, 억새꽃, 동남각루' 전문

 

 

각루란 성곽 주위를 감시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다. 수원화성엔 동북각루(방화수류정), 동남각루, 서남각루(화양루), 서북각루 등 4곳이 있다. 각루의 위치는 한결같이 높은 곳에 있어 전망이 좋다. 이중 방화수류정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동북각루는 수원화성의 백미라고 할 만큼 아름다워 항상 관광객으로 붐빈다.

 

그러나 동남각루는 지동시장을 비롯해, 팔달문 일대 시장 가까운 위치에 있음에도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지 않은 편이다. 화성을 산책하는 이들이 무심히 지나친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의 시야가 가장 넓은 곳이다.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해 남공심돈과 마주 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는 중요한 시설물임에도.

 

그리고 이곳엔 슬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수원 화성엔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의 순교 성지 북수동 성당, 시체를 내가던 시구문(屍軀門), 그리고 죄인을 참수하던 형장, 죄인을 가두었던 감옥이 있었다.

 

1907년 독일인 헤르만산더가 찍은 수원화성 남쪽 성곽. 멀리 팔달문과 남공심돈 사이에 남암문(시구문)이 보인다. / 수원시 자료사진

1907년 독일인 헤르만산더가 찍은 수원화성 남쪽 성곽. 멀리 팔달문과 남공심돈 사이에 남암문(시구문)이 보인다.
/ 수원시 자료사진

 

화성을 연구하는 단체인 (사)화성연구회가 화성성역의궤, 1911년도의 지적도, 1947년도의 항공사진, 현재의 지적도와 현장답사 등을 바탕으로 한 '화성 미복원시설 연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감옥은 현재 팔달문 가구거리에 있었다. 수원 토박이들은 지금도 이곳을 '옥(獄)거리'라고 부른다.

 

수원 옛 그림을 그린 윤한흠 선생은 생전에 "중죄인들은 이곳에서 수원천 남수문을 건너 동남각루 옆 언덕으로 끌고 와 목을 쳤다고 한다. 목이 떨어져 나간 시신은 성 밖 언덕으로 굴려 버렸으며, 죄인의 목은 시구문, 혹은 수구문, 시구문턱이라고 불렸던 남암문에 며칠이고 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형을 집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남수문 밖에서 기다리던 유가족이 목 없는 시신을 수습해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증언을 해주기도 했다.

 

또 수원화성박물관장을 지낸 역사학자 이달호 박사는 1970년대 홍수가 났을 때 흙이 무너져 내려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줬다.

 

이 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기 위한 것이다.

김우영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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